형식적으로만 보면 미국의 연방대법관 임명 절차는 한국보다 대통령의 입김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는 구조다. 미국에선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장을 포함해 모두 9명인 대법관을 지명하고 상원 인준 절차를 거친다. 한국은 대법원장이 후보자에 대한 임명 제청을 하고,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한 뒤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대법관이 항상 대통령의 의중을 고분고분 따랐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얼 워런 전 연방대법원장이다.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프레드릭 빈슨 연방대법원장이 사망하자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얼 워런을 후임에 전격 지명했다. 기존 대법관을 승진 발령하지 않고, 초짜 후보자를 대법원장에 전격 기용한 것은 아이젠하워가 워런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이젠하워는 검사 생활을 오래 했고, 공화당 당적으로 3선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워런의 뼛속 깊은 보수 성향을 믿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훗날 “워런을 대법원장에 지명한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워런이 이끄는 대법원이 진보적인 판결을 연이어 내놓았기 때문이다. 워런의 대법원은 1954년 ‘브라운 대(對)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인종 분리적인 학교 제도에 대해 만장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흑인 학생도 백인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길을 터놓은 이 판결은 1960년대 초반 흑인 인권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대사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미란다 원칙이 확립된 것도 워런 대법원장 때의 일이다. ‘미란다 대(對) 애리조나’ 판결은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면서 형사 사법절차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워런은 퇴임 이후에 ‘슈퍼 치프(Super Chief)’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었다. ‘최고의 대법원장’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만약 워런이 임명권자를 의식한 판결을 내렸다면 ‘아이젠하워의 푸들’이라는 불명예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주인공은 보수 성향의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다. 캐버노는 지난해 7월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고등학생 시절 성폭행 미수 의혹에 휩싸였다. 민주당과 여성들은 캐버노 인준을 반대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정면돌파를 선택했고, 지난해 10월 공화당이 다수당인 상원에서 캐버노 인준안이 통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소원대로 미국 대법원은 보수 5명, 진보 4명으로 재편됐다. 하지만 공화당은 한 달 뒤 중간선거에서 하원 다수당 자리를 민주당에 뺏겼다. 캐버노 인준 강행이 패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여성들이 공화당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캐버노가 달라졌다. 그는 지난 13일 애플 앱스토어의 앱 독점 소송과 관련해 기업이 아닌 소비자의 편을 들었다. 보수 성향의 캐버노가 진보 대법관들에 가세하면서 5대 4로 역전됐다. 연방대법원은 애플 앱스토어처럼 독점적 성격을 지닌 플랫폼에 대해 소비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뉴욕타임스는 “캐버노 대법관이 중도 성향을 보이면서 대법원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고 있다”며 “캐버노가 자신의 성폭행 미수 의혹을 둘러싼 논란을 의식한 듯 매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캐버노가 언젠가는 보수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고 의심의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캐버노의 변신이 단순한 일탈적 상황이거나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억지로 꽂아 넣은 캐버노 대법관도 코드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호평이 나왔다. 한국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코드 인사들로 채워졌다는 비판이 거세다. 최소한 한국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들이 성폭행 미수 의혹을 받았던 미국 대법관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말년에 ‘슈퍼 치프’ 소리는 못 듣더라도 누구의 ‘푸들’ 소리를 듣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