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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뤼순 기독교 묘지 묻혔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 신문 ‘보스토치나야 자랴’의 1909년 11월 4일자 기사.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나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는 안중근 의사의 심문 진술이 실려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죽음이 두렵지 않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일본인들에 의해 병을 얻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1909년 11월 2일 발행된 러시아 연해주 지역 신문 ‘프리 아무리예’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 총영사관에서 진행된 첫 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안 의사는 앞서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됐다.

또 다른 신문인 ‘보스토치나야 자랴’는 11월 4일자에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기쁘고, 나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는 심문 진술을 전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28일 하얼빈과 인접한 블로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러시아 극동지역 신문들이 보도한 안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수집해 공개했다. 의거 다음날인 10월 27일부터 사형 집행이 이뤄진 뒤인 1910년 4월 21일까지 실린 기사들이다.

의거 당시 극동지역 여러 신문들의 관련 기사들이 종합돼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신문에는 시종일관 의연했던 안 의사의 모습을 비롯해 의거 준비, 체포 및 이송 과정, 재판과 사형 집행 소식, 의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 등이 담겨 있다. 특히 안 의사 매장지가 그간 알려진 뤼순감옥 내 공동묘지가 아니라 인근 지역의 기독교 묘지라는 기사가 처음 발견돼 주목된다.

1910년 2월 14일 신문에서는 사형선고 소식을 전했다.

“안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었다. 선고에 앞서 그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은 약 1시간에 걸쳐 흥분하여 말하기를 모든 조선사람들이 이토를 혐오하고 조선 민족의 원수인 그를 나쁜 짓을 하는 무대에서 하루빨리 몰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우수리스카야 아크라이나’ 신문은 1910년 4월 21일자에서 안 의사의 사형 집행 장면을 보도했다.

“그는 하얀색의 명주로 된 조선 전통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마지막 기도를 하도록 허락받고 안은 조용히 기도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의 목에 매듭이 묶여졌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기사에는 안 의사 관이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는 내용도 나온다. “15분 후 그의 몸은 의사에 의해 검시되었고 관에 넣어져 튜렘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그 후 관은 지역 기독교 묘지로 옮겨졌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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