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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삭막한 도시에도 영혼이 깃들 틈이 있다”

심보선 시인이 2003년 미국 뉴욕 리버사이드파크에서 직접 찍은 풍경. 그가 자주 가서 앉았던 공원 벤치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다. 시인은 이 사진 얘기를 포함한 77편의 글을 첫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 수록했다. 심보선 제공
 
 
 
 


이 사진은 심보선(49·사진) 시인이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2003년 뉴욕 공원에서 찍은 것이다. 당시 그는 외롭고 힘들었다고 한다. 간혹 공원으로 가 사진 속 이 벤치에 앉곤 했다. 바람이 불면 벤치 앞 큰 나무들이 좌우로 흔들렸다. 여기 앉아 책을 읽기도 했고 멍하니 앞을 보기도 했다. 고요한 은신처였다. 누군가 애타게 그리웠는데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그 벤치를 찾았을 때 저 두 사람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둘의 사진을 찍었다. 이들의 요청으로 사진을 이메일로 보냈고 회신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우린 그때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아주 오랜만에 만났죠. 눈물을 흘렸고 웃음을 터뜨렸고 상처와 위로를 나눴어요. 당신의 사진이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됐어요. 고마워요.”

컬럼비아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그가 등단 25년 만에 처음으로 낸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 수록한 글 ‘그 벤치에서 일어났던 일’에 나오는 얘기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이 삭막한 도시도 때로는 영혼이 깃들 수 있는 틈새를 열어주는구나.’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는 그의 시구처럼 이 책에는 때로 우리의 영혼을 증거하고, 때로 우리의 비루함을 고발하는 다양한 글 77편이 수록됐다.

2007년부터 최근까지 쓴 산문을 가려서 뽑았다. 어떤 글에서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시인이, 어떤 글에선 진지한 사회학자가, 어떤 글에서는 발랄한 청년이 느껴진다. 그는 지난 4일 국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묶고 보니 내 시와 산문이 분리되지 않았더라. 시가 산문으로 연장되기도 하고 산문이 시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글이란 게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시가 된 글, 글이 된 시를 찾는 재미가 있다. ‘그 벤치에서 일어났던 일’과 연결해서 읽어볼 수 있는 시는 ‘삼십대’, ‘나무로 된 고요함’ 등이 될 테다. ‘인류의 예민한 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시 ‘축복은 무엇일까’와 비슷한 단상에서 나왔을 거란 느낌이 든다. 용산 참사에 대해 쓴 ‘그곳에 삶이 있다’에는 시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전문이 인용된다.

그는 책 후기에서 “내게는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영혼이란 수수께끼, 예술이란 수수께끼, 공동체란 수수께끼. 이 화두들을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 세 단어의 삼각형 안에서 관심의 초점을 잡는다. “3개 주제의 조합에서 지금은 예술이 그 꼭짓점인 것 같다”고 했다. 시인은 이번 학기에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사람들은 대학교수가 안정된 직업이라고 하지만 예술가들 사이에는 ‘교수는 예술가의 무덤’이라는 말이 있다. 교수는 교육자, 연구자로서 타협을 해야 하는 면이 있다. 요즘 나는 예술가들이 자기 삶과 커리어에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데 관심이 간다”고 했다. 그는 직업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 훈련’을 한다.

“머릿속에서 혼자 하는 리허설이다. 우연히 보게 되거나 겪게 되는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때로 그 상황을 비껴 본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나름대로의 트레이닝이다. 종이에 메모할 때도 있고 SNS에 남기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 방식으로 쓴 글이기 때문일까. 그는 독자도 주변의 일과 다른 이의 삶에 고개 돌리길 기대한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산문에 내가 어딘가를 기웃거린 장면이 있었다. 내가 본 무언가, 대화 나눈 사람, 사진 찍은 사람…. 내 글을 읽는 분들이 용기 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재미 삼아 뭔가 해보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재미있기도 하지만 자신과 세상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말하다 보니 자기계발서를 낸 것도 아닌데 삶에 대해 조언을 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어 “여기저기에 관심을 갖다보면 사람살이나 세상살이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게 두리번거림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짧은 시간 누굴 만나든, 회의를 하든, 식당을 가든 일상에서 만남과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책에는 이런 만남과 순간이 평온하게 그려진다. ‘비교적 공평한 봄기운’이란 글은 그가 용달 기사와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얘기다. ‘영혼의 문제’는 식당에서 주인 내외의 대화를 엿듣고 영혼에 대해 명상한 글이다. ‘분향소에 가자’ ‘지옥의 청년들’ 등은 공동체의 여러 고통을 영혼의 문제로 보는 한 예술가의 선한 심성을 느낄 수 있다. 1994년 등단한 그는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 ‘눈앞에 없는 사람’(2011) ‘오늘은 잘 모르겠어’(2017)를 냈다. 첫 시집이 6만부 출판된 것을 비롯해 시집 3권이 지금까지 11만부 나갔다. 이번 산문집은 출간 열흘 만에 3쇄에 돌입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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