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병분류(ICD) 개편에 나선 세계보건기구(WHO) 때문에 국내 게임업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WHO가 향후 전개될 11번째 ICD 개편 작업에서 게임중독(게임사용 장애)을 정식 정신질환 군에 포함시키는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한 까닭이다. 미국정신의학회가 지난 2013년 정신질환 분류(DSM-5)를 발간하며 게임사용장애에 대해 향후 정신질환으로 지정할 수도 있음을 알린 지 6년 만의 일이다.
ICD-11의 게임사용 장애 진단기준은 아주 보수적이다. 평가기준도 엄격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을 ‘잘’ 즐기고 일시적으로 게임에 몰입해도 게임을 사용하는 행동 자체가 큰 문제로 발전하진 않는다.
문제는 게임사용을 조절하지 못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다. 실제 진료 현장에서 얼마든지 이런 게임중독 환자들을 관찰할 수 있다.
뇌 과학과 영상의학의 발전으로 게임사용 장애에 대한 근거들은 많이 축적돼 있는 상태다. 소아청소년기의 어떤 특성이나 우울증 혹은 주의력결핍과잉운동장애(ADHD)의 이차적인 합병증으로 게임사용 장애가 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중독은 중독일 뿐이다.
술은 인류의 장고한 역사, 전통,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류 산업은 그 자체로 경제적, 산업적 가치를 갖는다. 술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 사용 장애(중독)에 빠지고, 어떤 이는 단지 ‘애주가’ 수준에서 그친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게임도 술과 같은 산업적 가치를 지닌다. 게임은 첨단 산업기술의 결정체이며 복합 문화적 창작물이다.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중독과 관련된 게임의 공통점은 보상(rewards)이다. 예를 들면 게임은 예상하지 못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대단한 기회를 주고, 우연히 득템(아이템 얻기)을 하게도 만든다.
운동이나 영화, 바둑과 같은 즐길 거리에 일시적으로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대부분, 지속적으로 과도하게 몰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게임은 다르다. 일부가 게임중독, 즉 게임사용 장애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중독 물질이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것처럼 인간의 어떤 행동들은 뇌의 특별한 곳을 자극한다. 뇌 과학자들은 이 부위를 ‘보상 회로’라고 부른다. 물질이 아니면서도 뇌 속 보상회로를 자극해 행위중독을 만드는 것이 도박이다. 과거 충동조절장애로 구분이 되던 인간의 문제 행동들이 최근에는 행위중독으로 다시 분류되는 추세다. 이는 모두 과학적 근거에 따른 것이다.
이해 당사자인 게임업계가 게임사용 장애의 질병분류목록 등재에 우려 섞인 반응을 보이는 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계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좀 더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보여줬으면 싶다.
게임은 도박이나 마약과 다르다. 아직 발병 원인 탐구와 예방, 치료에 연구가 더 필요하다. 게임 산업 발전과 게임사용 장애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기선완 국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전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