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담배를 피워온 K씨(83)는 지난해 9월 폐암(비소세포편평상피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암이 양쪽 폐로 다 퍼졌다. 고령인데다, 콩팥 기능이 좋지 않아 기존 항암제를 사용할 경우 부작용이 걱정됐다. 의사, 가족과 상의 끝에 처음(1차 치료)부터 최신 면역항암제를 쓰기로 했다. 치료 후 6주 만에 양쪽 폐의 암이 50% 이상 줄어들었다.
면역항암제는 작동 원리상 암세포 표면에 있는 ‘PD-L1’ 단백질 발현율이 높을수록 좋은 치료 효과를 보인다. K씨의 경우 PD-L1 단백질 발현율이 80%였다. A씨는 지금까지 별 탈없이 치료받으며 살고 있다.
글 싣는 순서
① 꿈의 방사선치료, 양성자 vs 중입자
② 면역치료, 암과의 새로운 전쟁
③ 희소·난치암 환자에게도 희망을
④ 암, 운명을 갈라놓은 유전자
⑤ 로봇, AI가 바꿔놓는 암 치료
⑥ 암 생존자 200만명 시대
A씨 폐에 있던 암이 절반 가량 사라진 건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라는 면역항암제 덕분이었다. 1세대 화학항암제(세포독성 있음), 2세대 표적항암제(특정 유전자 돌연변이 타깃 공격)에 이어 3세대 항암제로 불리는 면역항암제는 2011년부터 활용되기 시작해 8년간 빠른 속도로 적응증을 넓히며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면역항암제는 환자 자신의 면역체계를 활성화해 몸속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돕는 다. 기존 항암제의 전신 부작용이나 내성 등 한계점을 낮추고 반응을 보이는 환자들에게는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게 해 생존기간을 늘려준다. 수술이 불가능하거나 진행(전이)·재발해 치료 옵션이 많지 않은, 말기 가까운(3~4기) 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면역항암제가 전 세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2015년 지미 카터(96) 전 미국 대통령의 악성 흑색종(피부암) 완치였다. 그는 뇌까지 암이 번졌으나 키트루다로 치료받고 암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면역항암제 개발에 시금석을 놓은 두 연구자는 지난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면역항암제가 세상에 나온 지 10년도 되지 않아 최고 과학상의 영예가 주어진 것이다.
한국에 들어와있는 대표적 면역항암제는 키트루다를 비롯해 옵디보(니볼루맙) 티센트릭(아테졸리주맙) 임핀지(더발루맙) 등이다. 이들 면역항암제는 전체 폐암의 80%를 차지하는 비소세포폐암, 흑색종, 두경부암, 호지킨림프종(혈액암), 요로상피암(방광암), 위암, 신세포암(신장암) 등 7개 암종에 사용 가능하다. 하지만 작동 메커니즘상 앞으로 더 많은 암종으로 사용 범위가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면역항암제 진화 중 “더 일찍…더 많이”
이런 면역항암제도 최근 치료 효과(반응률)를 높이고 환자의 생존 기간을 늘리는 쪽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먼저 암 환자의 ‘첫 치료(early treatment)’부터 면역항암제를 활용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수술 불가능한 전이성 비소세포폐암의 경우, 2차 치료제로 우선 허가가 났지만 초기(1차) 치료에서도 좋은 효과를 인정받아 허가 범위가 확대됐다.
실제 면역항암제는 다수의 임상시험을 통해 일찍 사용할수록 환자의 생존율과 삶의 질 개선은 물론 장기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지난달 31일~지난 4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임상종양학회(ASCO)에서도 이를 입증하는 연구결과가 공개됐다. 진행성 비소세포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키트루다’를 1차 단독 투여했을 때 5년 생존률이 23.2%로, 먼저 화학항암제를 쓴 뒤 2차 치료로 키트루다를 사용한 경우(15.5%)보다 훨씬 높았다. 또 진행성 폐암의 경우 기존 화학항암제 사용시 5년 생존율이 불과 5~6%인 점을 감안하면 생존율은 4배가량 향상됐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연세암병원 폐암센터 홍민희 교수는 “1차 치료부터 키트루다를 쓰는 것이 2차 치료때 처음 사용하는 것보다 효과가 크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사실상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진행성 폐암 환자 10명 가운데 2명은 면역항암제를 써서 완치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면역항암제를 기존 화학항암제, 표적항암제와 함께 사용하는 ‘병용 요법(cocktail therapy)’도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면역항암제와 화학항암제 병용 요법을 쓸 경우 화학항암제만 투여했을 때 보다 더 이상 암이 진행하지 않고 평균 생존 기간은 배 가까이(8.8개월 vs 4.9개월), 치료 반응률은 약 2.5배(47.6% vs 18.9%) 높았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면역항암제는 거의 모든 암종을 대상으로 전 세계에서 800여개의 임상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보령제약, 유한양행, GC녹십자셀, 동아에스티 등 국내 제약사들도 면역항암제 개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안명주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10일 “면역항암제는 2015년 국내 첫 승인 후 4년 만에 7개 암종의 치료 옵션으로 허가받아 다양한 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는 혁신적 의약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2차 치료에서 1차 치료로 ‘더 빨리’, 단독 투여에서 병용 치료까지 ‘더 많은 환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다양한 임상 연구가 진행 중이며 성과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면서 “앞으로 더 많은 말기 가까운 암 환자들이 자신의 상태에 맞는 면역항암제 치료로 개선된 효과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만 면역항암제의 허가와 활용 범위가 확대되고는 있지만 건강보험이 여전히 제한적으로 적용돼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적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면역세포, ‘항암 파워’ 키워 재투여
‘항암 면역세포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연구도 국립암센터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국립암센터 최범규 박사는 “인체내 면역시스템을 활용해 암세포를 파괴하는 원리는 면역항암제와 비슷하지만, 치료 방식이 다르다”면서 “즉, 암 환자의 혈액에서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면역세포(T세포, NK세포, 수지상세포 등)를 뽑아 이를 바깥에서 대량 배양(힘을 강화)해 다시 투여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암세포만 공격하기 때문에 세포독성이나 전이, 재발 등 부작용이 거의 없다. 특히 암이 내뿜는 특이 항원(단백질)을 잘 찾아내는 T세포, 이런 항원 인식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카티(CAR-T)세포’ 치료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국립암센터는 2011년부터 비인두암, 호지킨림프종, 악성 뇌종양, 표준 치료에 실패한 폐암 위암 췌장암 간암 환자를 대상으로 항암면역 T세포치료제를 개발해 임상시험을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2007년 악성 뇌종양인 신경교종을 진단받은 A씨(47·여)는 두 번 뇌수술을 받았으나 2013년 다시 재발해 국립암센터의 항암면역T세포치료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당시 기대여명이 6~24개월로 예상됐던 A씨는 이후로 더 재발하지 않고 안정상태를 유지하며 지금까지 살고있다. 우상명 국립암센터 면역세포치료사업단장은 “원래 갖고 있는 우리 몸의 면역기능을 활성화해 암을 없애는 항암 면역치료는 인류가 암과의 전쟁에서 싸울 새로운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면역항암제의 경우 일부 사용자에서 면역교란, 과다진행(종양 커짐), 심장독성 등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 사례가 최근 보고되고 있어 암과의 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을지 섣불리 판단하긴 이르다.
암세포 굶겨죽이는 ‘대사항암제’ 개발 속도 낸다
‘암만 굶겨 죽이는’ 치료제 개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암세포가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에너지(영양) 공급로를 차단·억제해 암세포의 성장을 막는 치료법으로, 난치성 암 극복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고 있다.
대사항암제는 1세대 화학항암제, 2세대 표적항암제, 3세대 면역항암제에 이은 4세대항암제로 불리며 전 세계 연구자와 제약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암 정복을 향한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이라는 희망섞인 기대도 나온다.
국립암센터 김수열 암생물학연구부장과 세브란스병원 강석구 교수팀은 지난해 악성 뇌종양인 ‘교모세포종’의 암세포 에너지 생산에 관여하는 ‘알데히드탈수소효소(ALDH)‘와 ‘미토콘드리아컴플렉스1’을 각각 ‘고시폴’과 ‘펜포르민’이라는 약물로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암 증식에 필요한 에너지의 50% 이상이 억제되고 동물실험을 통해 생존 기간도 50% 이상 늘어나는 걸 확인했다.
2017년 8월 세계 첫 대사항암제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뒤 몇가지 중요한 암대사 표적들(MCT1, glut1, GLS1, ACC 등)에 대한 임상시험이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김 부장은 “국립암센터가 자체 개발한 KN510 등 3가지 대사항암제에 대한 동물실험을 거의 끝냈으며 2021년쯤 사람 대상 임상시험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는 “신장암과 뇌척수암 등 치료제가 거의 없고 예후가 좋지 않은 난치암 환자를 우선 적용하고 다른 암종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하임바이오 등 국내 바이오제약사도 국립암센터로부터 특허 기술을 일부 이전받아 대사항암제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