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최근 삼성과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 관계자들을 소집해 ‘응징’이란 표현까지 사용하며 미국의 ‘화웨이 거래 금지’ 조치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중 두 슈퍼파워가 벌이는 무역전쟁이 이제는 글로벌 기업들에도 줄 서기를 강요하는 ‘볼모전’ 양상으로 비화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4~5일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 델(Dell), 한국의 삼성 등 주요 글로벌 기술기업들을 불러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중국 기술거래 금지 조치에 협조할 경우 심각한 결과(dire consequences)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인 ARM과 한국의 SK하이닉스도 면담에 참석했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주도한 이 자리에는 상무부와 산업정보기술부 대표들도 참석해 중국 최고위급에서 조율하고 최종 승인을 거친 경고임을 시사했다. 중국 정부는 중국 내 주요 기업들이 해외로 떠나는 ‘탈중국’ 움직임에 대해 다변화 차원 이외의 목적으로 이뤄지는 생산기지 해외 이전 움직임은 처벌(punishment)로 이어질 수 있다고 위협했다. 중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 조치에 협조하면 영구적인 결과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지금처럼 중국 기업에 부품을 정상 공급하는 한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기업들에는 도를 넘은 협박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험 수위다.
스콧 케네디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중국 정부는 외국과 분쟁이 있을 때 중국 시장을 무기로 다국적 기업들을 압박해 굴복시키는 방법을 자주 써왔다”며 “하지만 미국 기업들은 미국법을 위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도 노골적인 줄 세우기에 나섰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5G 네트워크 보안 문제를 이유로 우리 기업들에 ‘화웨이 배제’를 연이어 요구하고 나섰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 5일 한국 IT 기업들이 참석한 콘퍼런스에서 “5G 네트워크상 사이버 보안은 동맹국 통신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 요소”라며 “지금 내리는 결정이 앞으로 수십년간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를 선택하면 장기적인 리스크와 비용이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공개석상에서 한국 기업들에 화웨이 장비를 쓰지 말라고 요구한 셈이다.
그는 지난 7일 한국군사학회 주최 세미나에서도 5G 네트워크 안보 우려를 언급하며 “(한국이) 동맹이자 우방으로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중국 포위 구상인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고도 했다. 외교 소식통은 9일 “미국은 그간 외교 채널로 한국 정부에 인도·태평양 전략, 반(反)화웨이 동참 등을 요청했는데 한국이 계속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자 공개적인 압박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곤혹스러운 입장이지만 섣불리 한쪽 편에 서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중 5G 갈등이) 한·미 군사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위기에서도 기회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권지혜 기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