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 2012년 10월 6일에 일어났다. 한국 뮤지션이 한국어로 부른 노래로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인 ‘핫 100’에서 2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일기 시작한 K팝의 욱일승천 기세가 세계 음반 시장을 지배하는, 빌보드의 아성을 무너뜨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미국 음악시장
안재욱과 장나라가 일찌감치 중국 시장을 석권하고, 보아 동방신기가 일본 시장마저 정복하자 K팝 리더들은 마지막 스테이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문화산업 시장의 중추를 이루는 북미 시장은 아시아권 시장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대단히 폐쇄적인 시장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99%였다. 음반 시장 또한 빌보드 차트가 발표된 이래 비영어권 음악에 대해서는 인색한 태도를 견지했다.
예컨대 미국에서 스페인어는 인구의 16%, 거의 5300만여명이 사용하고 있는 제2 공용어다. 하지만 스페인어 노래가 인기를 끈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의 ‘바일라모스’,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가 각각 1999년과 96년 빌보드 정상에 올랐고, 그전엔 로스 로보스의 ‘라 밤바’가 87년에 1위를 기록한 게 전부였다. 특히 앞의 두 노래는 영어 가사가 섞여 있어 온전히 스페인어로 된 것은 ‘라 밤바’가 유일했다.
스페인어가 이럴진대 딴 언어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84년 도쿄올림픽 특수로 큐 사카모토의 ‘스키야키’와 벨기에의 수녀 가수 싱잉 넌의 프랑스어 노래 ‘도미니크’ 2곡만이 빌보드 정상을 밟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미국 시장이 얼마나 타국 음악에 인색한지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대중음악에 미국 시장은 거의 ‘저 너머의 세계’나 다를 바 없었다. 우리가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범접할 수는 없는 세계. 그러나 21세기의 첫 10년을 통과하며 어느덧 3대 메이저가 된 SM YG JYP엔터테인먼트는 동아시아 시장의 성공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게 된다. 이들 회사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JYP는 2006년 공연의 성지 중 하나인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비의 콘서트를 성황리에 치러냈다. 하지만 미국의 메이저 언론들은 그 음악적 가능성에 대해선 참혹한 비관론을 내놓았다. 한마디로 창의성 없는 미국 팝의 카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JYP의 수장 박진영은 한국이 자랑하는 걸그룹으로 승부하기로 작정했고, 2009년 원더걸스를 출격시켜 ‘핫 100’ 진입에 성공했다. 원더걸스의 ‘노바디’는 76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성과는 거기까지였다. 비록 한바탕 산들바람으로 끝났지만, 원더걸스의 ‘핫 100’ 진입은 초유의 성과이며 미국 빌보드로 하여금 방계 차트에 K팝 항목을 만들게 한 도화선이 됐다. 이것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 다음으로 두 번째였다.
SM은 보아와 소녀시대를, YG는 세븐과 투애니원을 미국 시장에 연착륙시키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원더걸스를 넘어서는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무력감이 팽배해지고 있던 2012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혀 엉뚱한 가수의 신곡 뮤직비디오 하나가 전 세계 음악팬들을 강타했다.
기적과도 같았던 ‘강남스타일’ 신드롬
싸이는 2000년 늦가을에 데뷔했다. 여섯 번째 앨범을 발표한 2012년에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긴, 쌍둥이 딸을 둔 거의 중년의 남자였다. 그가 문제작 ‘새’를 위시한 데뷔 앨범을 발표했을 때, 문제의식을 발견한 수용자는 거의 없었다. 서울 강남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투박한 마스크와 몸매, 민소매 패션, 우스꽝스러운 돌출 행동과 입담이 두드러졌을 뿐이었다. 싸이는 금세 잊힐 ‘안습’의 엽기 코드 연예인으로만 보였다. 그의 음악과 메시지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싸이는 대한민국 연예계에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보였다.
실제로 한때 그는 잊혀가는 존재였다. 5집 앨범 머릿곡에서 그는 자신의 활동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대마 1년, 자숙 1년, 대체복무 3년, 재판 1년, 현역 2년, 합이 8년, 데뷔 10년에 활동 2년.” 그는 마약 스캔들에 휘말렸고, 병역 문제로 치도곤을 맞았다. 이런 민감한 문제들에 걸리고 살아남긴 힘들다. 그러나 싸이는 다시 현역으로 입대해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싸이’는 엽기적인 연예인이었을지 몰라도 ‘박재상(싸이의 본명)’은 치밀한 작사가이자 작곡자였으며 기획자였다. 대마초 파동으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을 때 그는 절망하지 않고 댄스 뮤지션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설 전략적 전환을 준비했다. 그는 로커 신해철과 교류하며 록밴드 편성의 라이브 댄스 뮤지션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무후무한 기획을 준비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거리응원전이 펼쳐졌을 때 립싱크를 할 수밖에 없었던 댄스그룹보다 밴드 라이브를 펼치던 인디 록밴드가 현장에서의 호응이 훨씬 높았던 것을 체감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트리뷰트에서 ‘하늘’이라는 노래로 신해철의 넥스트와 협업했고,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에서는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엽기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지우고 ‘의식 있는’ 힙합 아티스트로서의 캐릭터를 강화했다. 그는 이를 통해 봄이나 가을 대학 축제에서 게스트 섭외 1순위 뮤지션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지속적인 노력이 가장 빛을 발한 건 콘서트였다. 당시 라이브 시장의 ‘No.1’이었던 김장훈과의 합동 공연 ‘완타치’는 2009~2011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는 조PD에게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신해철과 김장훈에게서 엑기스를 뽑아 자신의 권능을 완성한 치밀한 기획자였다.
하지만 그의 세계적 성공을 견인한 것은 데뷔곡 ‘새’에서부터 시작된 인디적 감수성의 저예산 뮤직비디오였다. 그의 뮤직비디오는 일관적으로 마이너리티의 풍자적 희극성을 담지한다. 그를 미국 시장으로 인도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만 하더라도 그에겐 특별한 새로움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의 남녀노소가 따라 하게 될 ‘말춤’을 선보인 이 뮤직비디오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탑재하게 된 유튜브 채널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비디오를 유심히 본 수많은 사람 중에는 스쿠터 브라운이라는 미국 최고의 거물 프로모터가 있었다.
그는 단번에 이 엽기행각의 우스꽝스러운 동양인 아저씨가 지닌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는 싸이를 미국 지상파 방송 메인 게스트로 세웠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낸 싸이가 미국 유학 시절 유일하게 습득한 유흥공간의 ‘네이티브 잉글리시’가 빛을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싸이는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공연을 했고,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라이브를 선보였다. 그의 신드롬이 의외로 조용했던 곳은 한류의 시발지인 중국뿐이었다.
싸이의 성공이 의미한 바는 작지 않다. 그는 현지화 전략을 꾀하지 않고 한국어로도 얼마든지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유튜브로 상징되는 동영상 콘텐츠에 기반을 둔 커뮤니케이션이 그 어떤 통로보다도 글로벌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도 보여줬다.
‘비(非) 강남 비주얼’의 강남 아저씨인 싸이는 한국의 강남 트렌드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아쉬운 대목은 싸이의 신드롬이 거의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로 끝났다는 점이다. 후속작으로 발표한 ‘젠틀맨’부터 완만하게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 ‘국제가수 싸이’의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다. 싸이 자신도 ‘강남스타일’이 왜 그렇게 크게 히트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으니, ‘강남스타일’ 신드롬은 기적이랄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라이브 엔터테이너의 왕자로서 싸이의 위용은 여전하다. 프로듀서로서의 역량도 아직 녹슬지 않았다.
‘그가 어제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래서 우문에 가깝다. 그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의 역할을 완수했다. 싸이는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와 소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변방 국가의 문화적 산물이 주류로 진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K팝이 지속가능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7년 뒤 방탄소년단이라는 보이그룹이 보여줄 예정이었다.
강헌<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