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가 스태프들과 표준계약서를 작성하고 주52시간 근로를 준수하며 영화를 제작했다는 미담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사실 영화는 여러 문화산업 중에서 표준계약서 작성이 가장 보편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업계이다. 근 몇 년 사이 이렇게 괄목한 개선을 보인 사례도 드물다.
영화 이외의 문화예술계는 표준계약서 도입이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다. 표준계약서를 비롯해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한 것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수 이진원이 가난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작가 최고은이 생활고로 아사한 것이 뒤늦게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됐다.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이들 예술인들이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2011년 일명 ‘최고은법’이라 불리는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되었으나 이후에도 연극배우 김운하가 고시원에서 사망한 지 닷새 만에 발견됐으며, 같은 해 독립영화 배우 판영진이 가난을 비관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등 예술인들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예술인 복지법이란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근로복지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예술인 복지법을 따로 제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의 예술인들은 노동법상 근로자의 지위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4대 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위에 언급한 예술인들의 죽음은 바로 이 사각지대에서 발생했다.
지난 19일 예술인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공연예술 분야 표준계약서 도입 토론회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개최됐다. 정부는 그동안 공연예술계 및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기술지원 표준계약서 개발 협의회’를 운영하며 공개 토론회 등을 통해 의견 수렴의 과정을 거쳤다. 2차로 열린 이번 토론회에서는 근로자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4대 보험 관련 규약이 누락되어 지적을 받긴 했지만, ‘근로기준법’ ‘하도급법’ 등을 적용하는 등 현장의 목소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이 일단은 엿보였다.
그럼에도 예술가를 ‘근로자’로 간단히 인정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은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우선 과거 ‘풍각쟁이’ ‘취미활동’ 정도로 폄하되어온 예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생계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제도적으로 아직도 안정된 지위와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가 스스로가 ‘노동자’라 인정받길 꺼릴 만큼 노동에 대한 인식이 아직 미성숙한 탓일 수도 있다.
1980년 유네스코는 ‘문화예술인 지위에 관한 권고’를 채택하며 예술가들의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고, 소득과 사회보장 측면에서 예술가들의 법적·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정당한 권익 보호를 위해 우선 예술가 및 예술 활동, 더 나아가 노동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