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BTS)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정점이며 완결이다. 이 놀라운 7인조 미소년 그룹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서태지가 가요계 정상에 오른 1992년부터 97년 사이에 태어났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하나의 세대 사이클이 도는 동안, 한국 현대사는 격렬한 갈등과 첨예한 대립이 각 분야에서 벌어졌다. 대중문화 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터넷과 SNS라는 초유의 미디어가 출현하면서 이 부문에서도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K팝의 혁명적 진화
지난 사반세기는 한국의 잠재력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지구촌 전 지역에서 추인받은 시기였다. 정치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랜 군부에 의한 통치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등장한 시기였고, 야당으로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진 시간이었다. 아울러 고졸 출신 수장을 앞세운 반권위주의 정권이 탄생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초유의 촛불 시위 끝에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시민혁명도 벌어졌었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변화는 더욱 강렬했다. 한국은 삼성과 현대라는 글로벌 기업을 앞세워 흑자 수출국으로 올라서며 전후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인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소득의 양극화는 심각해졌다. 이는 청년고용정책의 실패로 이어졌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이념적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다이내믹 코리아’가 긍정적인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한국사회를 분석하거나 예측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96년 H.O.T.와 젝스키스의 폭발적인 성공과 함께 시작된 아이돌 그룹 열풍과 기획사 주도의 문화는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일거에 침몰시켰다. 가요계는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구조를 띠게 됐다. 곧이어 터진 외환위기 국면에서 한국 대중음악 시장은 파산을 선언했다.
이때만 해도 한국 대중음악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생존한 기획사들은 ‘K팝 한류’라는, 거의 성공 불가능한 미션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내수시장밖에 존재하지 않던 한국 대중음악의 범주를 동북아시아로, 동남아시아로, 그리고 마침내 북미와 유럽 대륙으로 확산시키는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를 위시한 메이저 기획사들은 세계 주류 음악시장 진입이라는 거대한 꿈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열정적인 꿈은 동방신기와 빅뱅이라는 ‘진화형 아이돌 그룹’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두 그룹은 1세대 아이돌 그룹이 지니고 있던 본원적인 한계, 즉 가창력과 음악적 독자성 부족이라는 장애물을 단번에 뛰어넘는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아이돌 그룹에 대한 삐딱한 시선도 일거에 잠재워버렸다. 트렌드 상품이라는 짧은 라이프 사이클에 대한 의구심도 날려버렸다. 동방신기 출신 김준수가 아직도 뮤지컬 시장에서 비교 불가능한 티켓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나, 빅뱅의 지드래곤이 ‘롱런 아티스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한국 아이돌 그룹 문화가 어린 여성팬의 호주머니를 노린 단타성 소비재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동방신기의 일본 정복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보이그룹과 걸그룹이 명멸했다. 아이돌 그룹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형 대중음악의 모델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동안 아이돌 그룹 포맷은 세계 음악시장의 메이저 장르가 아니었다. 일종의 틈새시장 콘텐츠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만 이 포맷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을까.
첫 번째 비결은 댄스뮤직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미국의 아이돌 그룹 뉴키즈온더블럭의 세계적인 성공 이후 선진국에서의 아이돌 그룹 콘텐츠는 급격히 쇠락했다. 쇠락의 이유는 아이돌 그룹 육성과 마케팅에 드는 비용이 많고 시장에서의 생명력도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과 SNS로 네트워킹된 세계의 젊은 문화수용자들은 국적과 인종을 넘어 가장 트렌디한 비주얼 음악 상품을 원했다. SM·YG·JYP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한 한국 기획사들은 치밀한 트레이닝 과정을 통해 다양한 개성을 지닌 콘텐츠를 개발해 이들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렇게 K팝은 록과 R&B라는, 기존 메이저 장르 사이의 틈새시장을 장악했다.
‘made in’이 아니라 ‘made by’가 중요하다고 한 SM의 수장 이수만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의 주장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주술 같은 고정관념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감수성의 입체적인 재창조”라는 무기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60년대 초반에 미국 빌보드 정상에 오른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아이돌 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은 뉴미디어를 활용한 신속하고도 유연한 마케팅 전략이다. 기획사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뉴미디어를 통해 한류를 ‘일상화’시킬 수 있었다. 하나의 기업 차원에서 수행할 수 없는 마케팅이 한국의 젊은 네티즌 그룹을 통해 이뤄졌다. 이들은 K팝 콘텐츠를 세계로 퍼 나르는 ‘자연발생적 마케터’가 됐다. 이들의 네트워킹에 의해 이뤄지는 마케팅 효과는 기존의 일방통행식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을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외모와 안무, 패션 등 비주얼적 요소가 강한 K팝은 뉴미디어에 굉장히 적합한 포맷이었다. K팝은 온라인을 통해 금방 누군가와 ‘공유’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K팝이 선사하는 복합적인 미학을 간편하게 즐기게 됐다.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일본 아이돌 문화에 영향받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파산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한국의 영세 기획사들은 일본의 원형을 넘어 도전적이며, 격렬하고, 시각적이면서 입체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BTS가 써내려가는 새로운 역사
프로듀서 방시혁이 이끄는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산물인 BTS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이들이 2017년 이후 한국 보이그룹의 대명사로 부상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3대 메이저 기획사가 아닌 마이너 기획사의 콘텐츠였다. 이것은 3사 위주로 진행되던 K팝의 지형도가 다각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빅히트가 지닌 자본력의 한계가 이 그룹을 부상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했지만, 이 점이 바로 이들에게 커다란 무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BTS는 팬들과 SNS로 다양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미’라고 불리는 팬덤의 충성심을 집약적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거둔 성공의 가장 중요한 밑변인 아미는 이제 단순한 팬클럽이 아니다. BTS의 음악과 삶, 그 자체를 공유하면서 BTS와 동행하는 동반자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BTS 멤버들이 단순한 댄서나 래퍼가 아니라, 작사 작곡 편곡 역량을 두루 갖춘 인물들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들은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그려내면서 그 위에 성공과 좌절, 사유과 실천에 대한 메시지를 음악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아미뿐만 아니라 세계 젊은이들이 이들의 노래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BTS가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타이틀곡으로 지난 4월 내놓은 음반 ‘맵 오브 더 솔: 페르소나’는 발매 닷새 만에 ‘빌보드 200’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이로써 BTS는 대한민국 음악인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지난해부터 발표한 음반 3장이 연거푸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비틀스와 몽키스 같은 역사적인 밴드만이 해낸 놀라운 기록이기도 하다. 비영어권 국가로서는 110년 빌보드 차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직 빌보드 싱글차트의 정상을 밟진 못했지만 나는 앨범차트 1위가 더욱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싱글은 유행의 상징이지만 앨범은 충성도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BTS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그리고 그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이 어디까지 도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들은 이미 빌보드를 점령했고 미국 순회투어와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콘서트를 매진시켰다.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미 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불멸의 예술성이겠다. 그리고 언어와 인종을 뛰어넘는 거대하고 지속적인 공감과 소통 능력이 이들의 숙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언제나 그래왔듯 한국 대중음악의 잠재력이 마지막 칸을 채워줄 것임을 나는 믿는다.
강헌<음악평론가>
‘명곡은 시대다’는 지난 100년간 가요계 역사에 선명한 자취를 남긴 명곡들을 재조명한 시리즈였습니다. 지난해 5월부터 격주로 1년 넘게 연재를 위해 수고해주신 강헌 음악평론가와 이 시리즈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