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방문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일본 기업들을 만나 레지스트, 불화수소 등 소재 공급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이 아닌 제3국을 통해 우회 수출하는 방안 등 다양한 대책이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부회장은 지난 7일 저녁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수출 규제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일본 취재진의 질문에 “장마네요(梅雨ですね)”라고 짧게 대답했다. 날씨에 대한 언급이자 소재 수출 규제가 삼성전자에 미치는 영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부회장이 방문했을 것으로 보이는 기업은 삼성전자에 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을 공급하는 스미토모, 레지스트를 생산하는 JSR, 에칭가스 생산업체 스텔라 등이 꼽힌다. 이 중 스미토모는 이건희 회장 때부터 삼성전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요네쿠라 히로마사 스미토모화학 회장과 친분도 두텁다. 때문에 사업과 관련한 직접적인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 일정에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간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고 조용히 움직일 것”이라며 “특히 양국 간 외교 문제가 얽혀 있어 상대방 기업도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과 일본 기업의 만남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안은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출로 예상된다. 미국 기업들이 화웨이 제재 상황에서 사용했던 방법이다. 미 정부는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 화웨이 수출을 금지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인텔, 마이크론 등 미국 IT 기업들이 미국이 아닌 제3국을 생산지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화웨이에 부품을 공급했다. 하지만 미국이 화웨이를 제재한 상황과 일본이 소재 수출 규제를 강화한 것이 같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일본 기업들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이 부회장의 일본 방문에 대해 일본 언론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NHK는 “이 부회장이 일본을 방문해 거래기업과 향후 대책 등에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삼성전자가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거래기업을 만나 일본 이외 공장에서 한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이번 일본 방문에서 거래기업과 직접 만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거래하는 기업들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겨냥해 칼을 꺼내 들었는데, 일본 기업이 정부 입장보다 삼성전자 이익을 우선 고려하는 태도를 보이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부회장이 그동안 일본 재계에 구축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거시적인 차원에서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삼성전자에 대한 ‘간접 지원’을 요청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부회장은 일본에서 일정을 마치고 이르면 9일, 늦어도 10일에는 귀국길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주요 기업 총수 간담회가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일본에서 누구를 만날지, 언제 귀국할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