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나는 신영균을 별다른 단서 없이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으로 규정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BIFF) 한국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 한국영화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회고전 책자 제목을 ‘신영균,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 머슴에서 왕까지’(이하 ‘신영균’)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평론가 김홍숙은 1998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진행한 ‘한국영화 명배우 회고전’ 10인 중 ‘신영균-머슴에서 왕까지’ 편에서 신영균의 이미지를 ‘우직한 시골 머슴형’ ‘뚝심 있는 맏이형’ ‘의리의 돌쇠형’ ‘폭군형’ ‘멜로드라마의 주인공형’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 분류를 빌려 그렇게 제시한 것이었다.
한국영화의 왕
위 규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래서일 듯하다. 신영균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카리스마’인 것은. “선이 굵다”거나 “사나이답다”거나 “남자답다” 등의, 어찌 보면 마초적인 수식어들이 으레 따라다니는 까닭도 그 때문일 테다. 아니나 다를까. 적잖은 평자들이 신영균을 말하면서 ‘아이콘’이라는 육중한 어휘를 동원하곤 한다. ‘신영균’의 필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회고전 책자를 쓸 때 인터뷰(‘연기는 나의 모든 것’: 천부적 재능을 열정으로 꽃피운 배우 신영균)까지 곁들인 주유신은 ‘신영균, 한국적인 남성미로 캐릭터 연기의 금자탑을 세우다’를 통해 ‘폭넓은 연기력과 강력한 카리스마의 배우 신영균’을 일별했다. “당시에 신영균은 김승호와 김진규를 잇는 연기파 배우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김승호 계보의 서민적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김승호가 막걸리 형이라면 김진규는 정종 형일 것이고 그 중간 격인 약주에 바로 신영균이 들어맞는다”는 기사까지 인용해가면서 말이다.
주유신은 신영균이 “‘개인의 얼굴’에서 ‘시대의 얼굴’로” 나아갔다며 이렇게 논고를 마무리 짓는다. “(신영균은) 가장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시대의 증후와 대중적 욕망을 압축적으로 포착해냈고, 그 누구보다 개성적인 육체성과 호소력 있는 스타 페르소나를 통해서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대중이 겪었던 혼란과 모순을 대리 표출하고 또 위로했다. …하드 바디와 소프트 마인드를, 역사와 개인을 결합시켜냄으로써 낭만적 연인과 초월적 영웅을 동시에 연기해낼 수 있었고, 영화를 통한 역사 쓰기의 전범을 일구어냈다.”
그러면서 그는 “(신영균이) 영화계를 대표하는 톱스타를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래서였다고 했다. 한 배우에 대해 이 이상의 찬사가 있을 수 있을까.
신영균 특유의 카리스마와 연기력, 스타성 등은 무엇보다 신상옥 감독의 두 문제적 사극 영화를 통해 형성됐다. ‘연산군-장한사모 편’(1961)과 ‘폭군연산-복수, 쾌거 편’(1962)이었다. 이 기념비적 ‘연산군 시리즈’에서 신영균은 “상승하는 에너지로 화면을 장악해나간다. 그것은 왕이라는 절대 권력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억울하게 어머니를 잃은 한과 분노,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복수 욕망에 사로잡힌 진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유지나, ‘한국영화 황금시대, 빛나는 남성 이미지 트로이카,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을 통과하며’)
신영균은 ‘연산군’으로 1962년 제1회 대종상영화제와 이듬해 제6회 부일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다. 연산처럼 “문제적 인간으로서의 임금”이든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 의롭게 사라진 비극적 영웅”(신강호, ‘근대화 시대의 아이콘: 신영균의 스타 이미지와 캐릭터’, ‘신영균’)이든 신영균에게는 줄곧 왕의 역할이 단골로 주어졌다. 전자로는 ‘강화도령’(1963) ‘철종과 복녀’(1963) ‘달기’(1964) ‘세조대왕’(1970) 등이, 후자로는 ‘사랑의 동명왕’(1962) ‘태조 이성계’(1965) ‘태조 왕건’(1970) 등이 해당된다. 신영균처럼 다채로운 왕 역을 통해 각인된 배우가 한국영화사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아는 한은 없다.
한국영화를 위한 헌신
그렇다고 신영균이 왕 전문 배우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기 스펙트럼에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박암 이낙훈 등 서울대 출신 배우들과 더불어 활약했다. 의사고시에 합격해 치과 개업을 한 신영균의 영화 데뷔작은 조긍하 감독의 ‘과부’(1960)였다. 머슴 성칠 역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등극한 신영균은, 유지나도 진단하듯 “진중한 이미지의 다작 스타” “탈주하는 반영웅의 자기 환영적 매혹의 이미지 스타”였다. 신성일과 함께 ‘김승호의 아들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신강호가 적시하듯, 신영균은 “결코 길들지 않은 야성”이었고 “가족 드라마의 기둥”이었으며 “마음속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고”, 때로는 “삼각관계에 헤매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모습들은 신영균이 소화한 320여편의 영화 속 대표적 이미지다. 이러니 어찌 신영균을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친김에 강성률의 입을 통해 그가 지닌 상징성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그는 ‘신영균과 사극: 시대가 욕망한, 또는 시대의 욕망을 간파한 카리스마’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신영균은 시대적 아이콘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시대적 아이콘은 단연 신영균이다.” 왜 신성일이, 김진규가, 박노식이 아니고 신영균일까. 답인즉슨 이렇다.
“그는 신성일 같은 댄디보이풍의 꽃미남 외모를 지니지 못했고, 김진규처럼 지적 이미지가 그윽한 외모를 지니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장동휘나 박노식처럼 액션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배우도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신성일 김진규 최무룡과는 다른 외모로,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과는 다른 아우라로 당대 최고 스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영균은 1973년 이후로는 배우 생활과는 거의 담을 쌓다시피 한 채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무엇보다도 영화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신성일 최무룡 김진규 박노식 장동휘과는 달리, “사업과 정치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배우”가 됐다. 흥미롭지 않은가. 나를 포함해 5명의 영화 전문가들이 한 인물을 놓고, 이처럼 거의 동일한 평가를 한다는 사실이.
영화 너머의 삶으로 눈길을 돌리면, 흥미로움은 놀라움으로 바뀐다. 그는 ‘연산군’을 포함해 ‘열녀문’(1963) ‘달기’(1964)로 대종상에서 남우주연상 세 번 받았다. ‘상록수’(1962) ‘빨간 마후라’(1964) 등으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도 남우주연상을 두 차례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는 2010년대까지 연기를 지속한, 아끼던 후배 신성일과는 달리 1978년 ‘화조’ 이후 영화배우로서는 은퇴한다. 이후 명보극장을 경영했고 제주에는 신영영화박물관을 개관했다. 1996년에는 신한국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2004년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연기를 향한 열정을 잊지 못해 2012년에는 서울대 연극동문회 소속 연극인들이 제작한 연극 ‘하얀중립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외에도 한국영화계 후진 양성을 위해 명보아트홀을 사회에 기부했다. 그해 12월 30일에는 재단법인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창립해 지금까지 ‘신영균 회장-안성기 이사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재단은 지난 5월 ‘제17회 필름게이트’를 통해 제작지원작(우수작품) 5편을 선정했다. 필름게이트는 2011년부터 지속해서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공모를 통해 진행하고 있는 단편영화 창작지원 사업이다. 아는가? 2013년 제66회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황금종려상 수상작 ‘세이프’가 다름 아닌 이 필름게이트 수혜작이었다는 것을. 이 얼마나 멋진 노블레스 오블리주인가.
<전찬일 영화 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