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문자 경전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주목받고 있다. 대법원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에 대해 국가 소유라고 판결을 내렸는데도 소장자 배익기씨가 “그 가치의 10분의 1인 1000억원을 주면 돌려주겠다”고 버티면서다. 근거가 되는 1조원설은 오도된 것임이 국민일보 보도를 통해 밝혀졌다. 가치 산정에 참여했던 서지학자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문화재 자체가 아닌 다른 산업에 미치는 산업연관 효과까지 감안한 가치라고 확인했다. 남 교수는 또 “국보 70호인 간송본이 더 귀중한 문화재라는 건 두말할 것 없다”고 말했다. 상주본은 습기에 얼룩지고 불탄 흔적이 있을 뿐더러 간송본보다 떨어져나간 쪽수가 더 많다. ‘상주본 사태’는 2008년 상주본 출현 이전까지 훈민정음 해례본 유일본으로 알려졌던 간송본의 진가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간송 전형필이 일제 강점기 훈민정음 해례본을 입수한 곳은 서울 인사동 네거리의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이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인 1930년(24세) 무렵 문화재 보존에 뜻을 굳혔다. 오세창의 권유로 한남서림을 인수해 골동상인 이순황씨에게 경영을 맡긴 1930년대 중반부터 수집 활동은 본격화됐다.
한남서림은 1910년을 전후해 서적상 백두용(1872∼1935)이 개업한 근대기 고서점 중 하나다. 다른 서점들이 교재와 소설 등 신구 서적을 모두 취급했던 것과 달리 한남서림은 고서만을 다룬 독보적인 존재였다. 사서삼경, 즉 칠서(七書)가 가장 인기 있었다. 1920년대 전성기에는 시골에서 손님이 올라오면 여러 사람의 부탁을 받고 오는 까닭에 한 번에 수백권씩 팔리기도 했다.
간송이 한남서림을 눈여겨본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30년대 들어 경영이 어려워진 한남서림을 재정적으로 돕다가 주인 백두용이 사망한 이후에는 아예 인수했던 것이다.
한남서림은 간송이 고서화를 수집하는 본거지였다. 1933년 정선의 화첩인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1934년 신윤복의 화첩인 ‘혜원전신첩’(국보 제134호)을 여기서 거래했다. 간송이 신문에 낸 ‘고서적 고당판(옛책판) 고서화 고가매입’ 광고 문구엔 해외로 헐값에 팔려나가던 우리 문화재를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으로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극에 달한 1943년,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었다. 그 과정은 그의 배포와 촉을 보여준다.
그해 늦여름. 간송은 여느 날처럼 저녁을 먹은 뒤 서점에 나가 있었다. 평소 잘 아는 고서 중개인이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바삐 서점 앞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이 저리 바람을 가르며 가는 걸 보니 필시 무슨 일이 있다’고 직감한 간송이 그를 세웠다.
“안동에서 큰 물건이 나왔습니다. 훈민정음입니다.”(중개인)
“얼마인가.”(간송)
“1000원은 줘야지요.”(중개인)
“내 그 열배인 만원과 자네 중개료 1000원을 얹어줌세.”(간송)
당시 1000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훈민정음을 얻는 데 큰 기와집 열 채 값을 내놓았던 것이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했다. 양반이 문자와 지식을 독점했던 시대,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마지막 8년을 그렸다. 역사 왜곡 논란을 떠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글의 가치와 세종의 정신이다.
어디서 세종의 진심과 애민을 느껴볼 것인가. 광화문 세종대왕상은 주변과 부조화를 이루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만으로도 세종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다.
한남서림은 어떤가. 연산군의 한글 탄압 이후 수백 년 묻혀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역사적 장소이자 문화재 지킴이 간송의 숨결이 밴 곳이다. 개화기 탄생한 근대 서점의 역사를 증거하는 무대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장소를 필요로 한다. 한남서림은 불행히도 개발의 역사에 묻혀 사라졌다. 간송은 광복 이후 수집 활동을 그만뒀다. “독립이 됐으니 저는 좀 게을러도 됩니다. 이제는 누가 사도 우리 것 아닙니까”라면서.
1953년 간송의 손을 떠난 한남서림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몇 차례 주인이 바뀌더니 1962년 건물이 철거됐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번지다. 한남서림이 있던 그 자리, 표석이라도 세워야 한다.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