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2월 13일 중국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됐다. 일본군은 참혹한 대학살과 강간,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일본군들이 중국인 여성들을 강간하려다 남편들이 뛰어나오자 그들을 총으로 쏴 죽여 연못에 버렸다. 집 근처 거리와 골목은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진링대학에서 한 여성은 일본군 17명에게 윤간을 당했다. 진링대학교수 부인도, 9세 소녀와 76세 할머니도 강간을 당했다.”(진링대학 미국인 교수 베이츠의 증언)
“일본군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00~4000명의 중국인을 한꺼번에 잡아들였다. 일본군은 태평문 밖에 철조망을 쳐 사람들을 가둔 뒤 땅에 지뢰를 묻고 폭파시켰다. 그 후 성벽에 올라가 아래로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시체가 산더미여서 아래쪽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본군은 산 사람들을 ‘확인 척살’했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제16사단 병사 도쿠다 이치타로의 기억)
‘20세기 중국사 강의’(진충지)라는 책에 소개된 난징대학살의 참혹한 기록이다.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이 불과 6주 만에 30만명을 학살하고 수만명의 여성을 강간한 인류 최악의 잔인한 범죄다. 일본군 장교 2명이 ‘100인 목베기’ 시합을 벌여 일본 신문에도 보도됐다.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도 일본은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는 항일에서 중국과 동병상련을 느낀다. 난징대학살을 떠올리면 우리 일처럼 분노와 울분이 치민다. 그래서 최소한 역사 문제로 일본과 싸울 때 중국은 우리 편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이 우리에게 경제보복을 하는 상황에서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조금 당혹스럽다. 한·일 갈등을 ‘개싸움’에 비유하거나 ‘일본보다 한국이 싫다’는 글도 자주 눈에 띈다. 그렇게 참혹한 학살을 당하고도 일본 편을 들다니. 참 섭섭하지만 중국인들의 사드(THAAD) 앙금이 여전한 탓이라고 믿고 싶다. 중국인들은 한·일 갈등에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산에 앉아 호랑이 싸움을 구경한다)란 말도 자주 거론한다. 적이 싸우면 가만히 기다렸다가 어부지리를 취한다는 의미다.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진리가 담겨 있다. 지난 6월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가 미·중 무역·군사 갈등에서 든든한 우군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원숭이가 산 위에 앉아 두 호랑이 싸움을 지켜본다”는 말로 속내를 드러냈다. 중·러는 요즘 밀착을 과시하지만 수차례 국경 충돌을 빚은 앙숙이다.
최근 우리는 한·일 갈등에서 미국에 중재자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뒷짐 지고 오히려 일본 편을 드는 듯한 뉘앙스도 풍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일본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했다. 미국도 한·일 갈등을 이용해 스스로 실리를 챙기겠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중재는커녕 방위비 분담금 인상, 호르무즈 해협 호위연합체 참가 요구에 이어 중거리미사일 한반도 배치를 암시하며 청구서만 잔뜩 내밀고 있다.
우리는 외교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강대국의 동정심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했다. 국제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을 보면 속이 터진다. 여당 최고위원은 “이 땅에 친일 정권을 세우겠다는 그들의 야욕에서 정치 주권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다. 반일 감정을 이용해 자유한국당=친일이란 굴레를 씌우겠다는 속셈이다. 야당 원내대표는 뜬금없이 ‘신쇄국주의’라고 문 대통령을 비난했다. 촛불시위에 ‘좌파정권 전위대’, 핵무장론에 ‘아베와 이란성 쌍둥이’라고 몰아세우는 비난전도 가관이다. 최근 우리 주변 국제정세는 한·일 갈등뿐 아니라 미·중 무역전쟁이 환율전쟁, 군사갈등으로 격화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구태에 젖어 망국적 정치 놀음이나 하고 있다. 우리를 가소롭게 보는 아베의 웃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