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 통틀어 가장 ‘치명적 매혹’의 디바

소녀적이면서도 성숙미가 넘치고 청순가련하며 때론 모성적이기까지 한, 복합적 매력의 소유자 문희. 입체적인 이미지에 있어서만큼은 당대 여배우 가운데 독보적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시리즈물로 인기를 끈 ‘꼬마 신랑’의 극 중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 신파·멜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극 중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가수 이미자가 부른 주제곡의 인기에 편승해 드라마를 영화화한 ‘섬마을 선생’의 극 중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지극히 사적인 소회로 시작하련다. 2016년 11월 24일, ‘별들의 고향’(1974)과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바보선언’(1983) 등을 선보이는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 이장호 감독 특별전을 찾았을 때였다. 어느 순간 지하 로비 엘리베이터에서 뿜어 나온 어떤 광채가 내 눈을 사로잡더니, 누군가 내렸다. 왕년의 스타 배우 문희 여사였다.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아니 한국영화사 100년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해온 ‘치명적 매혹’의 디바!

그 광채는 분명 기술복제를 넘어 디지털 조작의 현시대에도 여전히 존재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소위 아우라일 터였다. 그것은 2014년 제67회 칸영화제 개막 당일, ‘언어와의 작별’로 프랑스 뤼미에르 대극장을 찾은 ‘현대영화의 대명사’ 장 뤽 고다르의 후광을 느끼고 불현듯 뒤를 돌아봤던 때에 이은, 생애 두 번째의 신비한 체험이었다. 그들이 나타날 것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어떻게 그런 아우라들을 경험할 수 있었던 건지는, 내게도 의문이다.

60년대 윤정희·남정임과 트로이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영화 보기 50여년, 영화 스터디 37년, 영화 평론 26년차의 전문가인 나는 왜 문희에게 수십 년간이나 매혹당해왔던 것일까? 한국 영화사 최고 여배우라고 평가하는 것도 아니거늘. 그 영예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영화평론가 강유정이 “한국 영화사의 거의 전부이자 대명사”요 “한국 영화사의 페르소나”라며, 더 이상은 불가능할 극찬을 바친 최은희의 몫이다. 객관적 눈으로는 매혹성에서 문희는 김지미에 미치지 못한다. 연기 생명력도 그렇고, ‘시’(이창동·2010) 같은 치명적 걸작이 부재하다는 점 등에서도 그녀는 경쟁 트로이카 중 한 명인 윤정희에게도 뒤처진다. 또 다른 트로이카였던 고 남정임과의 비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자료원이 1998년 진행했던 ‘한국영화 명배우 회고전’ 10인 중 여배우로 최은희 김지미 윤정희와 함께 남정임은 포함됐으나, 문희는 아니었다.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러나, 문희에게는 상기 여배우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어 그 존재감이 비상한다. 그들에게 결여돼 있는 어떤 복합적 이미지랄까. 문희는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비서구적 이미지 덕에 토속적·한국적이라고 수용돼왔다. 그렇다고 촌스럽다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소녀적이면서도 성숙미가 물씬 풍긴다. 때론 모성적이기까지 하다. 청순가련과 직결되는 이유겠으나, 더욱이 캐릭터들의 희생성에서는 압권이다.

그녀가 출연한 대다수 영화들이 신파성 멜로드라마들이라는 이유로, 그토록 복합적인 디바인 문희를 그저 청순가련형 배우로 간주해온 기존의 평가들은 내게 관습적 오독이요, 나아가 모독으로 비친다면 지나친 무례일까. 판단컨대 위 모든 이미지들을 다 겸비한 한국 여배우는, 내가 아는 한 문희 외에는 없다. 김지미나 두 트로이카의 연기의 출중함엔 이의가 없으나, 복합적 여성 스타-배우라고 평하기는 주저된다. 최은희에게서도 소녀성을 감지하기란 미션 임파서블이다. 스타의 핵심 특질 중 하나가 이미지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문희의 입체적 이미지는 남다른 주목과 상찬을 요한다.

‘청순가련’으로 가둘 수 없는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두루 구현한 대표적 캐릭터가 신영균 전계현 김정훈 등과 열연한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1968·69·70·71)의 혜영이다. 이 시리즈는 관객 37만명 동원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1편에 이어, 2편 25만명, 3편 20만명, 완결인 4편 15만명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일궈냈다. ‘꼬마 신랑’ ‘속 꼬마 신랑’(이규웅·1970) 등 꼬마 신랑 시리즈의 꽃봉이도 한몫하긴 했으나, 결국 혜영 캐릭터가 어린 씨네필이었던 내게 문희를 생애의 치명적 매혹으로 각인시킨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혜영과 조우한지 50년 가까이 된 지금,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본 혜영의 드라마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그 드라마들은 끝까지 지켜보기 쉽지 않을 신파요, 최루성이긴 하다. 더러 입과 대사가 맞지 않기도 하는 후시 녹음에, 성우들이 더빙하기도 했을 연기들이 적잖이 거슬리기 십상이다. 세련은 고사하고 캐릭터에 요구되는 섬세한 연기는 언감생심인 감마저 없지 않다. 특히 문희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50년가량 전의 산물이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런 기술적 흠들은 물론 그 신파나 최루성을 과도하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어색한 연기도 시대의 부산물이지, 개별 연기자들이 책임질 영역은 아니다.

그런 시대적 낙후성을 고려할 경우, 그 시리즈는 70년 전후의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대중적 텍스트로서 손색없다. 김신호 역 신영균의 중후함, 신호의 본처 역 전계현의 성숙함, 아들 영신 역 김정훈의 재기발랄함도 그렇지만, 혜영의 성격화나 문희의 인물 해석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 싶다. 그 시대에 그렇게 희생적이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가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문희 아닌 혜영을 상상할 수 없기에 흥미는 배가된다. 그 시리즈가 왜 신드롬적 열풍을 일으켰는지, 왜 아직도 한국 멜로드라마의 대명사로 머물러 있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두용 감독이 자료원이 발간하는 ‘영화천국’ 61호에서 피력한 진단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선다. “‘신파’나 ‘최루성 멜로’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다소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작품은 관객의 감성 속 깊은 곳에 닿아 짙은 공감과 눈물을 끌어내기도 한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한국 신파·멜로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본처와 첩의 갈등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어 사회성 드라마의 기초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을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려실 부산대 국문과 교수가 자료원 ‘한국영화걸작선’에서 말했듯, “이 영화가 오랜 세월 그토록 많은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한 신파적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교육이 유일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된 양극화된 사회의 비애를 포착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18세 때 1000대 1 경쟁 뚫고 데뷔

혜영이 문희의 전부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녀 또한 그 점을 강변한다. 개인적으로 ‘초우’(1966)와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더 아쉬운 데뷔작 ‘흑맥’(1965)을 좋아한다고. 평론가 김종원에 따르면 ‘흑맥’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만추’(1966), ‘삼포 가는 길’(1975)과 더불어 “이만희 영화의 정점”이다. 이문희의 동명 장편 소설을 옮겼는데, 문희는 KBS 탤런트 시험 오디션을 받다가 조감독 눈에 띄어 데뷔전을 치렀다. 신성일이 분한 불량배 두목 독수리를 사랑하는 고아 출신 미순 역이었다. 문희는 66년 제5회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며 스타덤을 예약했다. 영화는 1000여명의 응모자 가운데 열여덟 살 대학 신입생의 데뷔작이라는 점 등에서 화제를 모았다. 문희는, 본명이 이순임이었던 그녀에게 감독이 원작자의 이름을 따 붙여준 예명이라고.

신성일과 또다시 호흡을 맞춘 ‘초우’는 정지우 감독의 대표작으로, 문희의 결정적 출세작이다. 신성일 엄앵란 커플을 탄생시킨 ‘맨발의 청춘’(김기덕·1964) 등과 함께 60년대 대유행을 했던 장르인 청춘물의 대표격 영화다. 프랑스 대사관저 식모와 자동차 정비공인 하층 계급의 젊은 남녀가 서로를 속이며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이용하려다 진실이 드러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감각적 영상미로 극화했다.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주제곡 ‘초우’도 동반 성공을 거둬, 패티 김도 스타 가수의 대열에 오르게 됐다.

이후 71년 결혼 발표와 더불어 은퇴할 때까지 2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문희는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68년 제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수상한 ‘막차로 온 손님들’(유현목)과 같은 해 제7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긴 ‘카인의 후예’(유현목), 이경재 작 KBS 라디오 드라마 ‘섬마을 선생’과 이미자가 부른 주제가의 인기에 편승해 방송극을 영화화한 ‘섬마을 선생’(김기덕·1967),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가수 윤심덕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윤심덕’(안현철·1969), 국내 최초의 70㎜ 영화인 이성구 감독의 ‘춘향전’(1971) 등이 있다. 이쯤 되면 꽤 폭넓은 연기세계를 펼쳐온 게 아닐까. 이런데도 문희를 고작 ‘청순가련’ 정도의 틀에 가둬두겠는가.

문희는 연기계를 떠났으나, 영화계는 떠나지 않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긴 한때 꽤 오랫동안 사회활동을 자제하긴 했다. 하지만 93년 남편의 작고 후에는 삶의 방향을 다시 한 번 선회했다. 한국종합미디어 대표이사, 자료원 이사, 문화관광부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회 위원,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이사 등으로 활동해왔다. 현재도 백상재단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비록 연기는 하지 않고 있으나, 문희 그녀는 아직도 현역인 셈이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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