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난 장소는 캐퓰릿가의 가면무도회였다. 원수 가문인 몬태규가의 아들이 자신의 집안 마당까지 숨어 들어와 심지어 자신의 딸과 ‘썸’까지 타는 동안 캐퓰릿가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역시나 줄리엣의 사촌 티볼트는 한눈에 로미오를 알아보고 바로 처단하려 하지만 줄리엣의 아버지가 이를 막아선다. 이유는 그곳이 가면 무도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전통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빤히 알아보지만 모르는 척하며 어울리는 중립지대의 역할을 해왔다. 원수 가문의 아들이 자신의 딸을 희롱해도, 로미오 친구 머큐쇼의 짓궂은 장난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캐퓰릿 가주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로미오 일행을 맞아들인 까닭은 이 때문이다. 사랑의 표본으로 전 세계에 회자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바로 이런 중립지대에서 탄생했다.
수천년간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대립의 역사 와중에도 인류는 간혹 가면무도회와 같은 무풍의 중립지대를 설정해놓고 스스로 숨통을 틔우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크리스마스에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합의하에 대치를 중단하고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서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았으며 심지어 축구 게임도 했다. 일명 ‘크리스마스 정전’이라 알려진 이 작은 휴전은 일선 병사들끼리의 자발적인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훈훈한 에피소드를 파투낸 것은 이 상황을 보고받은 양쪽 군 수뇌부였다. 이 사건을 이적 행위로 규정한 그들은 주동자를 색출해 그중 일부를 본보기로 처형했다. 이후 1918년까지 이어진 긴 전쟁 중 ‘크리스마스 정전’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과 총성 없는 전쟁 중 관(官)과 민(民)이 보여주는 엇박자는 이런 ‘크리스마스 정전’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와 개인을 구분 지을 줄 아는 한국 국민들은 자발적인 대(對)일본 불매운동을 벌이면서도 일본 국민들을 보듬어 안는 현명함을 보여주었고 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 지자체와 대학들은 어렵게 이어진 다양한 문화 및 학술교류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단절하며 철 지난 방식으로 애국심을 과시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 유학했다는 이유로 취소된 한국 원로화가의 개인전은 일본인뿐 아니라 현재 일본에서 공부 중인 한국인 유학생들까지 경악하게 할 뉴스다.
가면무도회와 같은 중립지대는 상생이 필연적인 글로벌 사회에서 소통을 통해 대립 기간을 줄이고 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문명의 영역이다. 문화 교류의 장을 우리의 의견을 알리는 매개로 활용하는 유연성은 고사하더라도 최소한 국민만큼 전장과 중립지대를 구분할 줄 아는 위정자의 현명함이 아쉬운 시기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