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보편적 규범의 위기 드러낸 플라시도 도밍고의 ‘미투’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오른쪽)가 지난 28일(현지시간) 헝가리 세게드의 성 겔레르트 포럼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함께 공연한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즈의 손을 잡고 있다. 도밍고는 30여년간 9명의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된 이후에도 여전히 유럽 공연 일정을 이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에 대한 ‘미투’ 폭로에 세계 오페라계가 양분되고 있다. 우선 유럽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심지어 도밍고의 모국 스페인은 중상모략이라며 그를 두둔하는 움직임이 지배적이다.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베를린 슈타츠오퍼 예술감독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2019/20 시즌 예정된 도밍고 공연을 그대로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아레나 디 베로나와 라 스칼라, 영국의 코벤트 가든에 이르기까지 주요 오페라극장들도 ‘무죄 추정’ 원칙을 고수하며 도밍고를 옹호하고 있다. 추문 이후 첫 무대인 지난 2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에서 그는 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청중들로부터 기립 박수갈채를 받았다. ‘친(親)도밍고’ 기류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반면 미국의 분위기는 결이 상당히 다르다. 지난 13일(현지시간) AP통신이 띄운 이 속보에 미국 주요 언론과 오페라극장들은 민감하고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9월 시즌 개막 갈라 공연이 예정된 도밍고의 출연을 취소했다. 도밍고와 친밀함을 과시했던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또한 그의 리사이틀을 취소했다. 그가 감독으로 있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는 현재 조사에 착수한 상태이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예정된 그의 모든 출연을 보류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오페라계에서 도밍고가 얼마나 중요하고 강력한 존재인지 상기시킨다. 그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상대적 열세인 히스패닉 공동체의 상징적인 성공사례였다. 할리우드 스타에 버금가는 유명세와 대중적인 인기를 안고 있는 그의 공연은 늘 흥행 성공과 수많은 기업과 부유층들의 후원을 보장해왔다. 재정난에 상시 허덕거리는 오페라극장들에게 그는 은인이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캐시 카우(cash cow)이다.

하지만 도밍고를 약탈형 권력자로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찮다. 78세의 나이에도 탐욕스럽게 후배들의 무대 기회를 박탈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휘와 오페라 연출까지 넘보고 있지만 재능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감독으로 재임하며 자신의 부인을 연출가로 상시 기용해 한 도시의 오페라극장을 일개 가족회사로 전락시켰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부패한 관료와 기업가 및 독재자들과의 돈독한 우정 또한 그의 도덕적 약점이다.

그를 ‘미투’로 기소한 8명의 성악가와 1명의 무용가가 스캔들이 필요 없는 ‘무명’이라는 사실은 이번 고발에 일면 진정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약자라는 이유로 이번 사건이 도밍고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으리란 회의적인 전망 또한 나오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입장과 전망을 낳고 있는 도밍고 사태는 우리가 절대적이라 주장하는 규범과 원칙 이외의 것들이 더 중요하게 고려되는 현실을 우울하게 드러낸다. 보편적 규범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기싸움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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