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군연구소(CNA)의 켄 가우스 국장은 30년 넘게 북한을 연구한 한반도 전문가다. 그는 대표적인 대북 제재 완화론자다. 가우스 국장은 지난 6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최대 압박 전략은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진전을 지연시키는 효과만 낳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워싱턴에서 소수 의견이다.
한국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한·미 갈등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가우스 국장은 “한국 정부가 재고하기를 희망한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는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요구하는 것이 더 위험스럽다”는 첨언도 빼놓지 않았다. 워싱턴에 있는 한반도 전문가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대북 강경론이 우세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아름다운 편지를 받았다”고 자랑할 때마다 한숨을 쉬는 전문가들이 많다. 가우스 국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 전략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정책”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런 그도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선 우려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지금의 워싱턴 기류다. 한국의 지소미아 결정에 대해 거의 모든 워싱턴 인사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본에 대한 반격으로 안보 이슈를 건드린 것은 레드라인을 넘은 행동이라는 게 미국의 시각이다.
한국을 향한 미국의 시선이 차갑다 보니 흉흉한 얘기들도 나돈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지소미아에 대한 입장을 바꿔도 예전과 같은 한·미 관계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이 흘러나온다. 잠복했던 주한미군 문제도 메인 이슈로 등장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외교적 치적이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가시적 비핵화 조치와 주한미군 감축·철수를 맞바꾸는 딜을 시도할 수 있다는 루머는 끊이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분담금을 대폭 올리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감축·철수 카드를 어떻게든 이용할 것이라는 우려는 한물간 얘기에 속한다.
미국 의회는 지난해 8월 현재 2만8000명 규모의 주한미군 병력을 2만2000명 이하로 줄일 수 없도록 제한하는 내용의 국방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이 주한미군 논란을 막는 자물쇠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미국에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크다. 법은 언제든 개정될 수 있는 것이고, 야당인 민주당도 정치적 계산을 하는 정당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인 성향과 내년 11월 미 대선이라는 정치적 스케줄이 맞물릴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승리를 위해선 뭐든 할 기세다. 미국 사회의 뇌관인 인종차별 문제도 서슴없이 건드린다. 그는 한반도 문제도 표로 접근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계속 달래야 미국에서 표가 되는 나라고, 한국은 돈을 뺏어 와야 표가 되는 나라로 보는 것 같다.
미국이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철회시키고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위기론을 증폭한다는 지적도 설득력 있다. 미국이 아무리 동맹이고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요구에는 맞서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워싱턴에선 미국이 지금의 한국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으로선 북한이라도 지렛대로 삼아야 하는데 “삶은 소대가리도 양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막말을 쏟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미국 인사들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논란에 대해 빠삭한 눈치다. 미국은 한국에 요구할 청구서 계산에 분주한데, 정쟁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모습에 불안감이 몰려온다. 초강력 허리케인 도리안이 미국 남동부 끝자락과 가까운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바하마를 덮쳤다. 미국도 도리안에 초비상이 걸렸다. 한국 상황을 보면 ‘미국 압박’이라는 허리케인이 몰려오더라도 당당히 맞설 준비가 돼 있는지 확신이 없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