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사흘간 북한을 다녀오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면담하지 않아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북한에 온 중국 외교수장을 김 위원장이 만나지 않은 것은 최근 부쩍 강화된 북·중 밀착 관계를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다음 달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협의하기 위한 실무적 성격의 방북이어서 면담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지만, 김 위원장 방중에 대한 중국의 ‘선물 보따리’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북한 노동신문은 5일 리수용 노동당 국제담당 부위원장이 왕 부장과 담화를 나눴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왕 부장은 이 자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펑리위안 여사의 인사를 김 위원장과 리설주 여사에게 각각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왕 부장과 김 위원장의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왕 부장이 북한에서 리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을 만났다는 소식만 전했다. 왕 부장은 지난해 5월 방북 때는 김 위원장을 만나 한반도 정세에 대해 논의했었다.
이례적으로 면담이 불발된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왕 부장이 들고 온 ‘방중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힌다”며 “중국에 가더라도 들러리만 서고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일(10월 1일)과 북·중 수교 70주년 기념일(10월 6일)을 전후한 시점에 김 위원장이 방중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때 ‘빈손’으로 귀국하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북한이 최근 리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명의로 미국을 비판하는 등 대미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미국을 자극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데다 홍콩 시위 문제까지 안고 있는 중국도 굳이 사안을 추가해 미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북한의 배후로 지목하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바 있다.
한편 리룡남 북한 내각 부총리는 한국이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지 않아 남북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리 부총리는 ‘남북 회담이 조만간 가능할 것으로 보느냐’는 국내 언론의 질문에 “남조선이 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에 명기된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니 그걸(회담) 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남북 대화 단절의 책임을 여전히 한국에 돌리고 있는 것이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