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도 사랑한 인간 엄앵란… 살아있는 전설이 되다


 
‘영화인 명예의 전당’ 조각상 제막식.



 
엄앵란·신성일 부부.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이사장 정진우 감독은 지난 2012년 신상옥 유현목 황정순 김지미에 이은 다섯 번째 ‘영화인 명예의 전당’ 입성을 기해 발간한 책자 ‘영원한 청춘배우 엄앵란’(이하 ‘엄앵란’)에서 이렇게 평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시대는 이분에서 꽃을 피웠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었다. 이분의 영화 연기에 대한 야망과 열정이 우리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그 크기를 누구하고도 비할 길이 없다”고. 한 영화인에 대해 이 이상의 극찬이 과연 가능할까. 유지형 조혜정 조관희 김종원과 함께 필자로 참여했던 나는 그러나, “신성일, 특유의 생명력으로 세월을 이겨낸 거대한 배우”에서 상반된 고백을 했었다.

숙명여대 가정과 출신, ‘학사 여배우 1호’인 엄앵란은 신성일에 비해 늘 ‘주변적 배우’로 머물러 왔었다고. 그때 밝혔듯 그 까닭은 무엇보다 평론가로서의 무지와 오독 탓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객관적 이유가 내재했던 것도 현실이었으니, 그녀만의 그늘들 때문이었다.

오드리 헵번 같은 톡톡 튀는 매력

주지하다시피 첫 번째 그늘은 다름 아닌 신성일이었다. 깜찍한 오드리 헵번 스타일로 대중을 사로잡으며 결코 바래지 않을 것만 같은 영원한 젊음까지 기대하게 했던 청춘영화의 아이콘 엄앵란에게 1964년 11월 14일 ‘한국의 제임스 딘’과 치른 성대한 결혼식부터가 어두운 현실의 출발이었다.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신혼기를 보내면서 그녀의 허리가 서서히 불어나기 시작한 것. 그 증거는 ‘말띠여대생’(감독 이형표·1963)의 히트에 이은 또 한편의 말띠 시리즈 ‘말띠신부’(김기덕·1966)에서 당장 확인된다. 계속되는 흥행 실패로 위기에 처한 극동영화사가 신성일-엄앵란 콤비를 다시 불러내 재기를 노렸던 ‘아네모네 마담’(김기덕·1968)은 치명타였다. 불어날 대로 불어난 몸으로 출연한 엄앵란은 결국 그녀 고유의 청춘 이미지를 스스로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혼 후 서서히 그녀는 ‘배우 엄앵란’보다 ‘신성일의 처’로 불리게 된다. 90년부터 성일시네마트 기획이사를 지내고, 결혼정보회사 대표 컨설턴트 등으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입담 좋은 방송인 엄앵란 이미지가 더해졌다. 신성일 부인과 방송인이란 정체성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톱스타 엄앵란을 희석시키기에 모자람 없었다. 특유의 재담을 자랑하는 그녀의 현실 내 실제 모습은 60년대 저널리즘이 창출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저서 ‘엄앵란, 뜨거운 가슴에 좌절이란 없다’(1996)나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1998) 등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인내로써 확보된 억척스러움이나 강인함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학사 여배우 1호’라는 꼬리표 또한 그녀만의 축복이자 굴레였다. 엄앵란이 연기보다 늘 연기 외적인 요인으로 주목받는 스타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국영화라면 으레 경멸하곤 했던 대학생들도 단지 여대생 엄앵란이 주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보러 갈 정도였다니, 왜 안 그렇겠는가. 일찌감치 시집 ‘사색의 구름다리’(1961)를 출간한 지적 이미지의 엄앵란은 특히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스타였던 것.

“김지미가 장미라면 난 채송화”

후배 김지미를 비롯해 60년대 후반의 트로이카 문희·윤정희·남정임도 엄앵란에겐 감당키 쉽지 않았을 크고 짙은 그늘이었을 터. 그녀는 톡톡 튀는 매력과 귀여움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이들 네 여걸 같은 미모의 배우는 아니지 않는가. 개성이나 캐릭터보다 외모가 중시되던 한국영화사의 격변기에 그녀는 다른 지점에서 경쟁력을 찾아야만 했다. 엄앵란의 거대함은 그녀의 변신에서 발견된다. 나는 참석치 못한 ‘엄앵란’ 필진들과의 모임에서 “김지미가 장미 같은 화려한 배우라면 나는 그보다 수수하지만 당당하게 자기만의 색깔로 꽃피우는 채송화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역이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일 그때 배우를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그 소회는 그 변신의 일면을 적시한다.

김종원에 따르면 한국의 여배우는 해방 전의 이월화 신일선 문예봉 등 1세대(1923~1932)와 김소영 김신재 등 2세대(1937~1944), 해방 후의 최은희 조미령 문정숙 등 3세대(1947~1955)로 분류될 수 있다. 열아홉 살 대학 1년 때 전창근 감독·주연의 ‘단종애사’(1956)로 데뷔한 엄앵란은 1년 뒤 ‘황혼열차’(김기영)로 혜성처럼 출현할 김지미와 더불어 4세대(1956~1964)에 속하는 여배우다. 이 쌍두마차가 맹활약을 펼치던 58년부터 64년까지의 7년여간이 흔히 한국 영화사의 중흥기로 평해진다. 한데 그 주역 중 1인을 주변적 배우로 여겼다니, 어불성설이었다.

엄앵란이 단종비 역을 맡은 ‘단종애사’는 호평 속에 10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공을 일궈낸다. 이후 엄앵란은 스타-배우로 성장해간다. 겹치기 출연은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바, 당시의 인기 척도였던 출연 편수가 꾸준히 늘어간다. 57년 3편, 58년 6편이던 것이 59년엔 14편으로 배 이상 급증한다. 그 수는 신성일과 결혼하는 64년까지 줄곧 증가한다. 60년 16편, 61년 20편, 62년 31편, 63년 28편, 64년 34편이었다. 엄앵란은 그 누구도 넘보기 어려울 ‘은막의 청춘스타’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4년 이후 그 수는 급감한다. 65년 18편, 66년 13편, 67년 0편, 68년 2편으로. 그로써 김지미와는 대조적으로 연기자로서 엄앵란의 생명력은 소진돼갔다. 임권택 감독의 ‘증언’(1973), 김기덕 감독의 ‘시거든 떫지나 말지’(1973), 이영우 감독의 ‘짝(1976)에 이르기까지 8편가량에 더 출연하긴 해도 말이다.

200편 출연작 중 신성일과 58편

200편 가까운 출연작 중 신성일과 함께한 편수가 무려 58편이다. 그 가운데 청춘영화의 대명사인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이 있다. 일본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 표절 여부에 상관없이 엄-신 커플이 이뤄낸 “청춘의 자화상은 젊은 관객들을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엄앵란은 순수하면서 도도하고 깜찍하면서도 사려 깊은 요안나 캐릭터를, 신성일은 건들거리는 몸짓에 반항적이면서도 우수를 담은 강렬한 눈빛의 건달 두수 캐릭터를 맡아 관객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조혜정) 그 감흥은 영화가 선보인 지 5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강렬히 남아 있다. 특히 신성일과 트위스트 김, 엄앵란의 연기에서 감지되는 모던함, 혹은 포스트모던함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엄-신 콤비가 처음 조우한 영화는 신성일의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였다. 그때의 일화를 신성일은 ‘청춘은 맨발이다’(문학세계사 2011)에서 이렇게 전한다. “나는 연기를 잘 못해 주눅이 들었다. 엄앵란은 이미 청춘스타로 떠올랐고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여동생 역인 그는 나와 엮이는 장면만 되면 쭈뼛거렸다. 같이 연기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우리가 부부가 되다니….”

‘엄-신 콤비 시대’의 신호탄은 유현목 감독의 격조 높은 멜로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1962)라는 게 중평이다. 이후 그들은 김수용 감독의 ‘청춘교실’ ‘혈맥’(1963), ‘학생부부’(1964), 정진우 감독의 ‘배신’ ‘목마른 나무들’(1964), 김기덕 감독의 ‘가정교사’(1963), ‘위를 보고 걷자’(1964) 등을 통해 청춘영화의 절정기, 나아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함께 일궈냈다.

물론 신성일과 함께하지 않은 엄앵란의 대표작들도 수두룩하다. 최무룡 신영균 남궁원과 함께한 김기덕 감독의 수작 ‘남과 북’(1965)에서의 열연은 인상적이다 못해 압도적이다. 정창화 감독의 ‘노다지’(1961)에서 펼친 깡패 역, 신상옥 감독의 ‘동심초’(1959)에서 최은희의 딸 역,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에서의 독립투사 김석훈 애인 역 등은 가히 ‘재발견’에 값한다. 그녀에게 65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긴 이형표 감독의 ‘아름다운 눈동자’ 등 그런 예는 얼마든지 더 있을 터.

‘엄앵란’ 내 원고의 마지막 대목을 옮기면서 이제 마무리 지으련다. “엄앵란 그녀는, 대한민국 그 어떤 여배우도 자기만의 것으로 확보하지 못했던 엄마·누나 상으로 영화배우 엄앵란을 넘어 여성이자 인간 엄앵란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신성일이라는 영원한 반 영웅적 청춘을 보완해 주면서 말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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