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격동의 1945년… 역사에 짓밟힌‘민초들의 삶’

‘오페라 1945’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한 공연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극은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해방 직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떻게든 기차에 오르려는 상황을 그리면서 시작한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한국 공연계가 대체로 불황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오페라의 불황은 고질적이다. 원인이야 여러가지겠지만 구시대적인 제작 시스템과 그보다도 더 전근대적인 콘텐츠는 대중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대중음악이나 뮤지컬이 동시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오페라는 고루한 스토리텔링과 가부장적 가치관을 고수해 왔으며, 새로 작곡되는 창작 오페라마저도 이를 답습해 온 것이 사실이다.

내일 당장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침체된 한국 오페라계에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1945’는 이 장르가 변화를 통해 존속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27~2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인 ‘오페라 1945’는 해방 직후 만주에서 한반도로 여정을 떠나는 한국인 위안부(분이)와 일본인 위안부(미즈코)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2017년 국립극단의 ‘1945’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원작은 식민인과 피식민인의 정체성에 미묘한 관점들을 제시하며 초연 당시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러한 논란의 여지는 오페라라는 다소 보수적인 장르로 변신하는 와중에도 여전했다. 연극과 마찬가지로 오페라는 ‘1945’라는 연도가 상징하는 ‘해방’ ‘항일’ ‘애국’ ‘자유’ 같은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민초들을 미시적으로 조명하며, 약자들 사이에서 재규정되는 죄 없는 죄인과 수치 없는 수치심, 불합리한 혐오를 드러낸다. 다만 오페라에서는 원작자 배삼식이 각색한 대본이 시적이고 압축적으로 다듬어졌으며, 시대의 다양한 맥락이 언어뿐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구현됐다.

특히 최우정은 기존의 오페라 아리아나 합창 형식에서 벗어나 동요와 민요, 군가, 창가, 심지어 트로트에 이르기까지 민중에 속하는 음악들을 유기적으로 녹여내며 오페라와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4막의 절정에서 객석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기차 장면은 연출가 고선웅의 진가를 드러냈다.

‘오페라 1945’의 파격은 연극에서 문제시되었던,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느끼는 연민과 우정뿐이 아니다. 이 오페라가 담아낸 일본어 아리아, 욕지거리 가사, 트로트 선율 등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관 이래 처음 선보인 것으로 지금까지는 금기시됐다. 무엇보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위안부라는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구원자로 나서는 남성의 손길을 거부하고 미즈코와 함께 남는 주인공 분이의 선택은 지금까지 한국 오페라에서 볼 수 없던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이 오페라가 상연되던 28일 우연히도 오페라극장 근처 일대는 ‘조국 사태’로 대립 중인 두 집단의 시위로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수작을 감상한 기쁨도 잠시, 오페라가 보여준 우리들의 지극히 이기적이고 잔인한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21세기 분열된 한국 사회를 그대로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즈코와 분이처럼, 우리에게 연대와 동행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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