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은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배우이다.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의 여주인공으로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의 주요 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동양의 여성 영화배우로서 최초였다. 당시 이 수상이 얼마나 의외였는지, 심지어 시상식 자리에 강수연이 참석하지 못해 대리수상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베니스라는 곳이 어딘지, 문학 작품이나 명화를 통해서나 알 수 있었던 그때,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니 이 어설픈 해프닝이 이해될 만도 하다.
1966년생,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이미 강수연은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조사항이 되었다. 아니 이 수상 이후로 강수연은 한국영화의 해외 수상 사례를 이야기하는 기준점이 되었고, 한국영화사의 변곡점이 되었으며 그 자체로 일종의 상징, 랜드마크가 되었다. 한국 영화사에 우뚝 서버린 것이다. 이 상징성은 2년 후 ‘아제아제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확고해졌다.
살아생전, 게다가 20대 약관의 나이에 상징이 된다는 게 비현실적일 정도이지만 이 호명을 현실로 만들어낸 게 바로 강수연이다. 한국영화사에서 다룰 수밖에 없는 이름 강수연. 그녀의 연기력, 삶의 여정, 행적 모든 것을 다 차치한다고 해도 강수연은 이미 한국영화사에 남을 수밖에 없다. 아니, 이미 남았다.
생애가 곧 경력인 배우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강수연은 아주 어린 시절 연기를 시작했다. 네 살이었던 1969년 데뷔 이후 아역 배우로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스스로 회고하기로 강수연은 주말에 쉰 적도 없고,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날 때쯤 학교 앞에 영화사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당시 TV 보급과 함께 새롭게 창조됐던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아역 배우는 부족했다.
주목할 것은 네 살 데뷔 이후 20대 성인 배우에 이르기까지 강수연의 활동에 공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수연은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매우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배우이다.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대개 아역으로 유명해진 배우들, 심지어 청소년 배우들마저도 성인 배우로 성공한 사례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 편의 영화를 찍었던 아역 전문 배우들이나 얄개로 불리었던 청소년 배우들 대부분이 성인으로 이미지 전환에 실패한 채 영화계를 떠나야 했다. 이는 비단 과거의 현상만은 아니다. 현재도 성공했던 아역일수록 성인 배역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강수연은 그런 의미에서 네 살이란 어린 나이에 데뷔해 스무 살, 서른 살 넘어까지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연기 인생을 확장한 희유한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강수연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아역 시절의 연기는 일종의 타고난 끼의 재현에 가까웠다.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연구해서 연기를 했다기보다 빼어난 외모와 어른들의 칭찬 속에서 아이가 할 만한 그런 기능을 수행했던 셈이다. 하지만, 강수연 스스로의 담담한 겸손과 달리 실제 1970년대 스크린과 브라운관은 강수연의 이미지를 필요로 했다. ‘비둘기의 합창’(1978) ‘슬픔은 이제 그만’(1978)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와 같은 영화에서 강수연은 어려움과 고난, 결핍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하고도 밝은 소녀상을 연기했다. 한편 드라마 ‘고교생 일기’에서는 당대 청소년 인기스타였던 손창민과 함께 발랄하면서도 씩씩한 여고생 역할을 소화해내며 시대적 열망을 담은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 강수연이 성인 배우로 변신한 것은 1985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 ‘W의 비극’이 있긴 했지만 10대의 청소년 이미지가 아닌 20대 여성의 이미지는 배창호 감독이 창조해낸 낭만적 일탈과 순수한 동경의 대학생을 통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엉뚱한 선배 안성기와 순수한 대학생 손창민 사이에서 10대가 할 수 없는 다른 고민을 하는 20대로서의 이미지가 제공됐다. 말하자면 성공적으로 영화적 성인식을 치른 셈이다. 이 성공 덕분에 강수연은 아역 배우로 박제되지 않고,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변곡점과 강수연
강수연의 삶은 한국영화사의 변곡점과 만나곤 한다. 가장 중요한 변곡점은 바로 임권택 감독의 절정기 작품에 강수연이 출연했던 그 시점이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는 그런 점에서 강수연에게 있어서는 모험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20대 성인 배우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씨받이’는 여러모로 20대 초반의 여배우에게 까다로운 작품이었다. ‘씨받이’의 주인공 옥녀는 천방지축의 17세 소녀에서, 욕망을 알고, 상실감에 스스로를 놓아버리기까지 하는, 즉 영화 한 편에서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인 면을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 옥녀는 씨받이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저 기름진 밥을 실컷 먹고, 논 열 마지기를 해우채로 받아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며 기뻐하는 철부지로 등장한다. 덥석 씨받이의 운명을 선택한 영화 초반의 옥녀에게는 자아도, 욕망도 없다. 그러다 보니 상처도, 고통도, 결핍도 없다.
하지만 그저 씨를 받아야만 하는 남자에게 욕망을 갖고, 거래 품목으로 여겨야만 하는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 고통스러운 눈빛은 철부지의 것과 달라야만 한다. 임권택 감독이 옥녀라는 캐릭터를 두고 “나이와 관계없이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살아낸” 캐릭터라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임권택은 매우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 어느덧 성년이 된 강수연에게서, 그 기량과 가능성을 읽어냈다. 그리고 강수연은 94분의 러닝타임 가운데서 소녀에서 여자를, 여자에서 한 서린 상실을 변주했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작업한 ‘아제아제바라아제’(1989)의 순녀 역시 진흙 속에 뿌리를 둔 연꽃처럼 세속의 더러움 속에서 한 폭의 깨끗한 영혼을 길어 올려야 하는 캐릭터였다.
강수연 연기 인생의 또 다른 변곡점은 1990년대와 함께 시작된다. 이른바 ‘코리안 뉴시네마’ 세대 감독의 작품들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90년대의 새로운 인물상을 담아냈다. 박광수 감독의 ‘베를린 리포트’(1991),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1991),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1992) 등은 80년대 한국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전달했다. 세련되고, 도시적이었고, 개인주의적이면서 한편 포스트모던했다.
문학과 대중음악 등의 폭발적 개방과 함께 시작된 포스트모던한 변화는 코리안 뉴시네마를 통해 다른 ‘정서’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그 다른 정서의 시점으로서 강수연의 이미지가 있었다. 남자와 자연스럽게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혼’은 거절하는 ‘그 여자, 그 남자’(김의석·1993) 속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한 현대 여성의 이미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의 당당한 여성 인물로도 변주되었다.
하지만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렇듯 코리안 뉴시네마 감독과의 높은 밀착도는 강수연에 대한 기시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세대와 구분되는 감성을 추구했던 영화들은 의도적으로 전사(前史)가 없는, 낯선 이미지의 여배우들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미 작은 거장이 된, 젊으나 한편 영화사적 인물이 된 강수연의 상징성이 오히려 완전히 다른 색깔을 추구하는 신세대 감독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2000년 즈음 강수연은 고작 34세 무렵이었지만 이미 데뷔 30년차의 배우였으니 말이다.
강수연 영화 인생의 또 다른 변곡점은 바로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의 강수연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 곤욕을 치르던 시절, 한국영화사의 또 다른 순간에도 강수연은 영화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영화 ‘베테랑’에 인용된 강수연의 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이 말이야말로 어쩌면 영화인 강수연의 배짱과 생을 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인인 줄도 모르고 영화인이 되어 성장하고, 나이 들고, 살아가며 스스로 영화인의 정체성을 재발견해가는 배우, 현재 진행형의 영화인, 강수연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