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안성기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 적이 있었다. 그가 없다면 우리네 한국영화는 얼마나 쓸쓸할까? 특히 전두환 정권의 3S(Sex, Sports, Screen) 정책의 여파로 ‘애마부인’ 및 ‘매춘’류로 대표되는 성애물이 범람했던 1980년대 한국 영화계는 얼마나 더 삭막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배우로서 생명력을 기준으로 평하면, 신성일 김지미 등을 포함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한국영화사의 또 다른 거대 배우.
다시금 안성기의 출연작들을 검색해봤다. 김지미의 데뷔작 ‘황혼열차’(감독 김기영·1957)로 5세 나이에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올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 첫선을 보인 ‘종이꽃’(고훈)에 이르기까지 총 편수는 160편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1980년대 출연작이 30편이다. ‘젊은 느티나무’(이성구·1968) 이후 ‘병사와 아가씨들’(김기·1977)로 복귀하기까지 10년 가까이를 학업과 군 복무 등으로 영화계를 떠나 있었다.
6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160편가량에 출연했고, 최전성기에 30편이면, 이 연재에서 다룬 선배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많다고 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또 80년대 한국영화가 대체적으로 70년대부터 지속됐던 침체·불황을 관통하고 있었다는 현실 등을 감안하면 적다고도 할 수 없겠지만.
80년대 한국영화의 아이콘
관건은 그 30편의 면면들이다. ‘이장호 영화세계’의 새 출발이자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기념비적 성취로, 더 나아가 한국영화 100년사의 어떤 전환점으로 간주되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에서 안성기는 배우로서 재탄생한다. 10년 가까운 공백이 있을지언정 그는 이전에 이미 57편에 출연한 바 있는, 어느 모로는 ‘중견’이었다. 그중에는 흔히 한국영화 100년사의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하녀’(김기영·1960)에서의 아들 창순도, ‘하녀’ 못잖은 김기영 감독의 야심작 ‘10대의 반항’(1959)에서의 근선도, 신성일의 출세작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1962)나 엄앵란의 대표작 ‘성난 코스모스’(이봉래·1963) 등의 아역도, 그리고 ‘병사와 아가씨들’의 병사 중 1인도 있다.
그들 중 ‘10대의 반항’으로는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 특별연기상과 대종상의 전신 격인 문교부영화상 문교부장관상 등을 수상하는 맹활약을 펼친다. 6·25 때 파괴된 서울을 무대로 소매치기와 절도로 살아가는 전후 부랑아들의 드라마. 아니나 다를까, 극 중 비중에 상관없이 안성기의 존재감은 일찌감치 빛났다. 심지어 이강천 감독, 최은희 김진규 신성일 주연의 ‘사랑의 역사’(1960)에서는 아버지와 미망인을 연결하려 애쓰는 단역으로도 무시할 수 없을 존재감을 뽐낸다. 데뷔 이후 한동안 웬만한 영화들의 아역을 도맡아 했다는 평가가 과장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국민배우’로 나아가기 위해 그는, 상기 이장호 감독의 으뜸 걸작을 경유해야 했다. 복귀작 ‘병사와 아가씨들’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제3공작’(설태호·1978) ‘야시’ ‘우요일’(박남수·1979)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기점으로 상황은 급반전한다. 한창 개발 중인 서울 변두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밑바닥 미생들의 휴먼 드라마에서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로 분해, 이발소 견습생 춘식(이영호), 여관 종업원 길남(김성찬) 등과 더불어 개연성·진정성 가득한 실감 연기를 선사한다. 데뷔 23년이 지나 주어진 제19회 대종상 신인남우상 등은 작지만 당연한 대가였다.
이후 그는 침체기였다는 8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하기 모자람 없는 적잖은 수·걸작들을 관통한다. 이동철의 동명 체험담 중 한 윤락녀 ‘카수 영애’ 부분만을 발췌해 영화화한 ‘어둠의 자식들’(이장호·1981)을 비롯해, 임권택 필모그래피의 변곡점 ‘만다라’(1981), 80년대 한국영화가 낳은 괴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원세·1981), 박찬욱이 “가슴 아프게 가난해도, 많이 배우지 않아도 아름답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평한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 안성기에게 82년과 83년 연속 대종상을 안긴 ‘철인들’(배창호)과 ‘안개마을’(임권택), 83년부터 연이어 한국영화 흥행 정상을 차지한, 배창호의 수작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이장호의 폭넓은 외연을 과시한 명품 에로물 ‘무릎과 무릎 사이’(1984)와 ‘어우동’(1985), 곽지균의 감성이 돋보였던 80년대 멜로드라마의 대표작 ‘겨울나그네’(1986), ‘코리안 뉴웨이브’의 도래를 알린 문제적 두 데뷔작 ‘칠수와 만수’(박광수·1988)와 ‘성공시대’(장선우·1988), 그리고 한국 코미디 영화사의 돌연변이적 개가라 칭해질,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9) 등이다.
가히 그 목록만으로도 숨이 가빠질 만도 하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과 ‘티켓’(1986) 정도를 빼면, 80년대가 배태한 한국영화 대표작들을 포괄하고 있다. 결국 80년대 한국영화계는 안성기의 시대였고, 안성기는 80년대 한국영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여전한 ‘캐스팅 0순위’의 현역
80년대만큼은 아닐지언정, 그 이후로도 안성기의 행보는 단연 눈이 부시다. 안성기에게 제1회 춘사영화상과 11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등을 동시에 안겨준 ‘남부군’(정지영·1990)을 위시해 박광수의 ‘베를린 리포트’(1991),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임권택의 ‘태백산맥’(1994), 정지영의 ‘부러진 화살’(2012) 등 사회성 드라마들도 그렇거니와, 강우석의 ‘투캅스’(1993)나 이명세의 ‘남자는 괴로워’(1995), 김태균의 ‘박봉곤 가출사건’(1996), 강우석의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이준익의 ‘라디오스타’(2006) 등에서 보여준 코믹 연기는 배우 안성기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유감없이 증거한다.
안성기는 특히 후배이자 단짝 콤비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4편,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1999) ‘라디오스타’에서 발군의 열연을 뽐냈다. 안-박 콤비는 한국영화 100년을 수놓은 시대의 남성 초상화로 손색없다. 이들 콤비의 ‘케미’는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신성일로 대표되는 꽃미남 배우들의 스타성과는 거리가 먼 ‘보통 사람의 얼굴’을 띤 스타-연기자 콤비. 그들은 김승호와 그의 적자들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신성일 등을 뒤잇고,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 김윤석 등으로 나아가는 가교로서도 부족함 없다. 그들이 있기에 한국영화 남성 배우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한들 과언이 아니다.
안성기는 6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건재를 넘어 캐스팅 0순위의 현역으로 인기 정상을 달리고 있다. 올 부산영화제에서 선보인 ‘종이꽃’에서도 그 위용을 자랑한다. 정한석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도 진단하듯. “선한 공동체에 관한 소박한 찬가”인 영화에서 나이 든 장의사로 분한 “안성기라는 배우가 망자의 관 속에 넣어 줄 종이꽃을 능숙하고도 정성스럽게 접어가며 묵묵히 염을 할 때, 그의 얼굴과 손길은 이 영화의 백미다.”
한 배우가 어떻게 이런 지속적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꼬방동네 사람들’을 촬영하다 조각가 오소영을 만나 결혼, 두 아들 다빈과 필립을 두었으며, 사생활에서도 스캔들 한 번 없는 모범적인 가장으로, 겹치기 출연이나 다작은 금물로 여긴다더니만, 그런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의 산물일 터.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중책을 동시에 맡아 수행해올 수 있었던 것도 그 한결같음 덕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안성기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문득 안성기의 숱한 대표작 중 딱 한 편만 꼽아 보고픈 충동이 인다. 답은 최소 10개 이상이 가능하겠으나, 내 답변은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고지를 넘은 ‘실미도’(강우석·2003)다. 무엇보다 압도적 카리스마 때문이다. 난 한국영화에서 그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알지 못한다. 이래저래 배우이자 인간 안성기의 그 깊이와 폭에 경이로워하지 않을 길이 없다.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