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론’의 충격파가 결국 터키와 쿠르드족을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터키군이 9일(현지시간) 이른 아침 국경을 넘어 쿠르드족이 장악하고 있는 시리아 북동부 도시 탈 아비아드와 라스 알-아인 인근으로 진격했다. 미군이 지난 7일 두 도시에서 철수를 시작하자마자 침공한 셈이다. 쿠르드족 민병대 ‘인민수비대(YPG)’는 결사 항전을 예고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날 “터키군이 시리아 북부에서 ‘평화의 봄’ 작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어 “터키의 목표는 지역 평화와 안정을 위해 남부 국경의 테러 통로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군사작전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고 터키 대통령실을 인용해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시리아 외무부는 자국 국영 사나통신을 통해 공개한 성명에서 터키의 침공 계획을 강하게 비난했다. 시리아 외무부는 “터키의 공격적 행동과 터키군의 국경지대 집결을 국제 규정과 유엔 헌장에 대한 노골적 위반으로 간주한다”면서 “(자국)안보 확보라는 허위 구실 아래 진행되는 터키의 확장적 팽창은 어떤 정당성도 확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쿠르드족은 군대를 국경지대로 보내 터키군의 공세에 맞서 싸우겠다는 입장이다. YPG가 주도하는 군사 동맹체 ‘시리아민주군(SDF)’의 마즐룸 코바니 사령관은 전날 뉴욕타임스(NYT)에 “우리는 항전할 것”이라며 “이미 지난 7년간 전쟁을 치러왔고 앞으로 7년 동안도 전쟁을 치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2014년부터 미국과 동맹을 맺고 지난 5년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IS와 전쟁을 치렀다. 전쟁에서 희생된 쿠르드족 전사만 1만1000명이 넘는다. 터키와 이라크 북부, 시리아·이란 고원지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인구가 4000만명에 달한다.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 전 세계 민족 중 최대 규모다. 쿠르드족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수차례 독립을 시도했는데 매번 주변국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쿠르드족이 미군의 IS 격퇴전에 적극 동참한 이유는 독립국가를 향한 그들의 오랜 꿈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미국이 시리아 북동부 일대에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터키에 이 지역의 쿠르드 병력은 눈엣가시였다. 터키는 이들을 자국 내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일부로 보고 두 세력이 연합해 분리독립운동을 벌이는 상황을 오랫동안 우려해 왔다. 그리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족 병력을 터키 영토에서 쫓아내는 작전을 준비했다.
그동안은 시리아 북부에 주둔한 미군이 안전지대를 설정해놓고 양측의 군사적 충돌을 막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철수 결정을 하면서 동맹이었던 쿠르드족은 생존조차 위협받는 신세가 됐다. 자신의 결정이 논란을 낳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 터키의 쿠르드족 공격을 경고했다. 그러나 하루 만인 8일엔 “너무 많은 이들이 터키가 미국의 큰 교역 상대란 사실을 쉽게 잊고 있다”며 태도를 바꿔 터키를 두둔했다. 궁지에 몰린 쿠르드족이 시리아 독재정부나 러시아와 손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