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들끓는 ‘뜨거운 광기’… 용광로서 벼려진 이 남자 ‘최민식’


 
영화 ‘넘버 3’
 
영화 ‘해피엔드’
 
영화 ‘파이란’
 
영화 ‘올드보이’




영화 데뷔작인 ‘구로 아리랑’(감독 박종원·1989)에서 최민식은 구로공단 노동자로 등장한다. 기술 하나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그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당시의 중간형 인물을 보여준다. 다음 해 출연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1990)에서 최민식은 주인공 형빈의 친구 태식 역을 맡는다. 노동자로 위장 취업한 지식인의 곁에서, 시골 출신의 소심한 친구 옆에서 최민식은 털털한 친구로서 그 역할을 해낸다. 대학생도, 노동자도 어울린다. 배우로서, 최민식이 가진 대단한 장점이다.

친구, 삼촌, 동네 건달, 우리의 그저 그런 이웃

이러한 면모는 ‘넘버 3’(송능한·1997)의 검사 역에서도, ‘조용한 가족’(김지운·1998)의 백수 삼촌 역할에서도 발견된다. ‘넘버 3’와 ‘조용한 가족’은 어떤 점에서 1990년대 말 한국영화에서 발견되는 변화를 보여준 작품인데, 톤과 매너에 있어서 어떤 유사점이 있다. 우선, 맥락 없이 끼어드는 유머가 그렇다. 최민식은 ‘넘버 3’에서는 진지한 고학력자 검사로서 정의를 부르짖고, ‘조용한 가족’에서는 조카랑 방을 나눠 쓰는 잉여인간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검사도, 백수삼촌도 그럴듯하게 다 어울린다는 것이다.

TV 드라마 출연의 성공으로 탤런트 이미지에 붙박여 있던 최민식은 90년대 말 다양한 영화의 출연과 메소드 연기를 통해 배우로서의 도약에 성공한다.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강제규·1999)에서 맡았던 북한 무장군 박무영도 그중 하나이다. 남성적이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박무영은 조연급 배우였던 최민식의 무게감을 단숨에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 최민식의 원점이라면 영화 ‘해피엔드’(정지우·1999)와 ‘파이란’(송해성·2001)을 빼놓을 수 없다. ‘해피엔드’에서 최민식은 유능하고 섹시한 아내에 밀린 채, 재취업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남루한 실직자 서민기로 등장한다. 실직한 지 어언 3개월, 그는 아내가 맡겨둔 아이를 돌보며, 양복을 입은 채 헌책방에 가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며 동네 이웃인 대학 여동창과 수다를 떠는 게 전부다. 영어 학원을 운영 중인 아내는 그런 남편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사실 아내에게는 숨겨진 애인이 있다. 성적으로도 별 매력이 없던 남편이 실직까지 하자, 아내의 마음은 훨씬 더 급격히 냉랭해져 간다.

영화는 초반 아내 전도연이 정부와 밀회하는 과정을 파격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이 영화의 진짜 동력은 무능하고 소심했던 남자 서민기의 변신이다. 성적, 경제적 힘의 역전에 주눅 들었던 남자는 외도의 증거를 수집하고 완벽한 범죄를 계획해 실현한다. 그는 아내를 살해하고, 아내의 정부를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만들어서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한다. 얼핏 보면, IMF 시대 무너진 가장의 서글픈 현실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해피엔드’는 그런 가장을 눈속임하려 했던 아내, 엄마에 대한 처절한 응징으로 끝난다.

최민식은 이 드라마 가운데서 소심했기에 훨씬 더 면밀하고, 무능했기에 더 폭력적일 수 있는 남자의 아주 오래된 자격지심을 연기해낸다. 아내의 손가락뼈를 부러뜨리며 결혼반지를 빼내는 장면에서는 앞으로 몇 년 후 우리가 ‘올드보이’에서 보게 될 그 뜨거운 광기의 차가운 들끓음을 먼저 목격한 듯도 싶다.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는 ‘파이란’에서도 발견된다. 싱크대 개수대에 소변을 볼 만큼, 질서도 원칙도 없이 살아가는 3류 양아치 강재가 진심 어린 편지를 남긴, 한 여자를 통해 변화한다. 삶의 이유도 목적도 없이, 부표를 떠도는 낙엽처럼 살던 이 남자는 누군가의 그 마음을 통해 드디어 처음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돌아본다. 그리고 한 마리 불쌍한 짐승처럼 갯바위에 앉아 펑펑 울어 댄다. 이 폭발적 눈물 앞에서 깡패이자 3류 건달, 양아치였던 강재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으로 다시 다가온다. 최민식은 ‘파이란’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청룡영화상,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첫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양아치 강재의 눈물에 감성과 인격을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최민식이다.

뜨거운 배우

그는 울 줄 아는 배우이다. 울 줄 안다는 것은 그, 최민식이 그만큼 뜨거운 배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박찬욱은 자신의 주요 영화에 출연했던 두 배우 송강호와 최민식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송강호는 차갑고 최민식은 불같다.” 그래서 송강호는 ‘복수는 나의 것’(2002)처럼 차가운 영화에, 최민식은 ‘올드보이’(2003)처럼 뜨거운 영화에 캐스팅되었나 보다.

박찬욱의 인생작이자 최민식의 인생작이기도 한 ‘올드보이’는 말 그대로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이 뜨거운 감정은 죄의식, 불안, 복수, 금기, 폭력과 같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단어들 사이를 흐른다. 그리고 그 감정의 용광로 한가운데 최민식이 있다. 장도리로 생니를 뽑고, 자신의 혓바닥을 가위로 자르는 이 가혹한 스펙터클은 하마터면 감정 과잉의 퍼포먼스가 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차갑고 건조한 박찬욱의 연출과 미장센 위에서 최민식은 굉장한 몰입감을 통해 발견 가능한 파토스를 연기해낸다. 무릎을 꿇고, 개처럼 짖고, 마침내 스스로의 신체를 훼손했지만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혼이 텅 빈 듯한 눈동자로 스크린을 응시하는 최민식은, 한 사람의 인생에 담길 수 있는 질곡과 심연을 모두 담아낸다. 그건 재능 있는 배우라 할지라도 좋은 감독, 스태프, 동료, 시나리오가 없었다면 만날 수 없는 연기의 폭발이다. 최민식은 매우 운이 좋은 배우이기도 하다.

최민식의 뜨거운 연기는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와 같은 괴작에서도 빛을 발한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라고 하지만 실상 최민식이 연기한 장경철은 살인 본능에 굴복당한 미친 짐승과 다르지 않다. 이성이나 질서의 감각이 없는 살인 중독자, 그의 더럽고 지저분한 폭력과 본능은 최민식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불편한 악, 그의 뜨거움은 어떤 점에서 감각의 역치를 경신하곤 한다.

최민식 연기의 큰 변곡점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윤종빈·2011)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최민식은 약 30년 전인 80년대, 이 땅의 평범하고도 타락한 아버지의 전형을 연기해낸다. 생존을 위해서는 혈연, 지연, 학연 모조리 다 동원해 써먹는 최익현은 단지 한 사람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산업화 시대를 이끌어 온 아버지 세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너그 서장 남천동 살지?” “경주 최씨 몇 대 손인가”와 같은 명대사는 바로 그런 세대의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으로서 최민식의 그 평범하고도 독특한 면모를 통해 입체적으로 전달되었다.

아버지로서의 최민식, 기성세대로서의 최민식, 어쩌면 과거를 그린 이 복고풍의 영화를 통해 최민식은 남자 배우로서의 다른 영역에 연착륙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의미에서의 남성 배우의 영역을 넓힌 것이다.

품위 고, 지조 있는 장수 이순신의 모습(‘명량’·김한민·2014)이나 대호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간직한 노포수(‘대호’·박훈정·2015)의 모습은 바로 이 확장된 영역에서의 다른 최민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뜨겁지만 그 뜨거움이 남긴 부산물들을 벼려, 단단한 검의 세계를 표현하는 배우로 진화하는 중이다.

두터운 얼굴의 사나이

최근, 21세기 한국영화는 대개 30~40대 남성 배우들이 주연을 맡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과장만은 아니다. 범죄 서사가 많고, 권력형 비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30~40대의 조직폭력배 검사 형사 경찰 범죄자 정치인인 경우가 많다. 이는 한편 50대를 훌쩍 넘어선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할 수 있는, 혹은 여성 배우들이 도움의 힘을 보태는 조연을 벗어나 주연으로 등장할 공간이 배우 좁은 영화 환경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서 최민식은 50대 이상, 장년 남성의 얼굴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배역을 여전히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비겁한 건달이나 비열한 정치인, 무게감 있는 리더의 모습이 공존한다. 뜨거움이 단단함으로 변화된 배우, 최민식을 통해 지금 여기 한국의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최민식의 얼굴은 다양한 삶의 질감과 보편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두터운 얼굴임에 분명하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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