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열린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조별리그 H조 3차전 남북전은 그야말로 황당함의 연속이다.
원정팀인 한국의 응원단, 취재진을 전혀 받지 않은데 이어 무관중 상황에서 경기가 진행됐다. 한국 선수 유니폼에 이름도 새겨지지 않았다. 두 시간 남짓한 경기에서 확인되는 것은 기록지에 작성될 숫자와 판정의 결과들뿐이었다. 북한 관중의 일방적 응원에 대한 부담은 덜었지만 제재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선수의 땀도, 심판의 호각소리도 전혀 전달되지 못한 채 경기가 열린 것은 월드컵사에 남을 희귀한 사례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북한과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조별리그 H조 3차전을 치렀다. 한국은 손흥민과 황의조를 투톱으로 세웠고 북한은 이탈리아 유벤투스 공격수 한광성으로 맞섰다. 결과는 0대 0. 후반 10분 수비수 김영권, 7분 뒤 수비수 김민재가 옐로카드를 받았다. 전반 한때 양팀 선수들 사이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이후 별탈 없이 끝났다고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설명했다. 한국과 북한은 나란히 2승 1무(승점 7)를 기록했으며 한국이 골 득실에서 앞서 1위, 북한이 2위를 유지했다.
경기는 승패보다 과정에서 더 화제가 됐다. 원정팀인 한국의 관중은 물론, 취재진·중계진도 참가하지 못했다. 경기 진행 상황은 오직 경기장에 파견된 아시아축구연맹(AFC)와 축구협회 관계자가 이메일로 대한축구협회에 알려온 정보를 통해서만 전해졌다. 그것도 경고 여부, 교체 상황만 전달됐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 경기를 실시간 보는 21세기에 20세기 초기형 ‘깜깜이 경기’가 펼쳐진 셈이다. 또 선수들 이름도 유니폼에 빠진 바람에 외부에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경기가 진행됐다.
약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김일성경기장의 관중석은 텅 빈 채 진행됐다.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직접 관람했지만 그가 본 것은 양팀 선수 22명과 벤치에 있는 코치진뿐이었다. 일각에서는 원정팀 응원단, 취재진 입국 불허에 대한 비판여론에 부담을 느낀 북측이 이 같은 결단을 내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대표팀이 평양에 도착했던 14일의 상황도 하루를 넘겨서야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대표팀은 당일 오후 4시1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오후 7시55분부터 10분간 경기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짧은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조차 5시간여 뒤인 이날 오전 0시30분쯤 축구협회 직원에게 전달됐다. 팬에게 회견내용이 알려진 것은 이날 오전 8시쯤이었다. 기자회견 소식을 12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평양에서 남북전이 열린 것은 1990년 남북통일 친선축구 이후 29년 만이다. 그래서 남북전은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에서도 ‘한반도 더비’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북한의 비협조와 무성의한 태도로 조소의 대상이 됐다.
영국 BBC방송은 경기를 앞두고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더비매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BBC는 “남북이 대결하는 것은 드문 일이고 북한 수도인 평양에서 경기하는 것은 더욱 흔한 일이 아니다”며 “그러나 생방송도, 한국의 팬도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북한에 있는 외국인 관광객도 이 경기를 관전하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은 경기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주심이 경기를 자주 중단해 평소와 다른 경기가 전개됐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