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5만 원군을 신라에 보낸다. 왜의 침략을 받은 내물왕이 ‘SOS’를 친 때문이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가야, 왜 연합군을 크게 이기고 왜를 격퇴했다. 내친김에 금관가야까지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고구려를 통해 중국 북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고대 국가로 발전했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인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한 신라의 행렬도 그림이 무덤 속 토기에 선명하게 새겨진 채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6일 경북 경주 황오동 쪽샘지구의 5세기 신라 무덤인 44호분 발굴 현장을 찾았다. 2014년부터 진행 중인 쪽샘 44호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발굴 조사에서는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와 말 문양이 새겨진 토기 발형기대(鉢形器臺·그릇받침), 제사와 관련된 유물 110여점을 확인했다.
44호분 주위에는 제사를 지낸 듯 일정한 간격으로 항아리가 배치된 흔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장경호(長頸壺·긴목항아리) 파편에 행렬도가 가는 선으로 새겨져 있었다. 항아리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각조각 났다. 그러나 남은 파편에는 말을 타고 행렬을 이끄는 사람, 이어 춤추는 사람과 수렵 장면, 무덤 주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말을 타고 개(추정)와 함께 가는 장면이 또렷했다.
대나무를 빗처럼 깎은 다치구(多齒具)를 사용해 쓸어내듯이 새겨 넣는 기법이었다. 그래서 오선지 모양으로 나오는 문양에는 사람이 말안장을 부여잡은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이 행렬도 위아래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반복돼 있다. 토기는 복원 시 높이 40㎝로 추정됐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지금까지 신라 토기에서 나온 무늬는 말이면 말, 사람이면 사람 등 단일한 문양이 전부였다”면서 “이처럼 스토리를 갖춘 것은 처음이다. 신라 회화 사상 첫 행렬도 사례로, 선각 기법 등 회화성도 우수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44호분 토기 속 행렬도는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4세기 중반) 행렬도, 무용총(5세기 전반)의 무용도 및 수렵도 등의 벽화 그림과 흡사하다. 이 시기 신라 무덤 부장용 토기의 경우 흙으로 빚은 인형(土偶)을 부착한 방법이 주로 쓰였던 것과도 차이가 난다.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에 이르는 5세기 전반까지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 상태로 지냈다”면서 “고구려의 선진 문물이 신라에 전해지며 고구려 바람이 크게 불었다”고 전했다. 그는 “귀고리, 팔찌 등 신라의 황금 장신구가 고구려 디자인과 비슷하다. 그러니 회화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쪽샘지구는 4~6세기 신라 왕족이나 귀족의 집단 무덤이 있는 지역이다. 현재까지 10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됐다.
경주=손영옥 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