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에서 2011년 민주화운동 ‘아랍의 봄’ 이후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일 울려 퍼지고 있다. 단초는 ‘왓츠앱’ 등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앱)에 대한 과세였다. 하루 20센트, 한 달 6달러(약 7000원)에 불과한 세금이었지만 그간 정치권의 부정부패로 쌓인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수십만명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AF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은 레바논 시위대 수십만명이 20일(현지시간)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나흘째 이어가며 수도 베이루트와 제2의 도시 트리폴리 등이 마비됐다고 보도했다. 시위대는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타이어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이어갔다. 2011년 민주화운동 당시 구호 “국민은 정권 퇴진을 요구한다”를 외치기도 했다. 시위가 레바논 전역으로 퍼지며 격해지자 학교나 은행 등도 문을 닫았다.
지난 17일 메시지 앱 이용자에게 내년부터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정부 발표 후 누적된 시민들의 불만이 시위로 폭발하자 정부는 곧 과세를 철회하겠다고 물러섰다. 하지만 시위대는 만연한 부패와 경제난 타개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배를 불려온 반면 국민들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불만이다.
레바논은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서 180개국 중 138위에 불과했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150%에 달하는 860억 달러(약 101조원) 상당의 재정적자가 쌓여 있고,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0.2%에 불과할 정도로 정치 불안정에 따른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시위에 나선 인테리어 건축가 셰린 샤와(32)는 로이터통신에 “정치가들이 역겨워서 이곳에 왔다.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이건 국가가 아니다”라며 울분을 쏟아냈다. 40대 여성 하난 타코체는 “우리는 지도자들에게 ‘떠나라’고 말하러 왔다”며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사기꾼이고 도둑”이라고 말했다.
사드 알 하리리 레바논 총리는 21일 연정 파트너들과 함께 정부 개혁안 마련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개혁안에는 2020년 예산안의 적자 제로(0)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과 장관 등을 포함한 전·현직 공무원 봉급을 50% 삭감하고, 33억 달러(약 4조원) 상당의 은행 기부금을 받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 예산 투명성을 높이고 개혁 진행을 감시하기로 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