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룩한 얼굴을 한 개구리 캐릭터 ‘페페 더 프로그’는 2017년 공식적으로 죽음을 맞았다. 원작자가 직접 사망선고를 내리고 관에 넣어 장례식까지 치렀다. 페페가 미국 인터넷에서 극우주의, 백인우월주의, 반유대주의 등 각종 유해한 사상의 마스코트로 널리 사용됐기 때문이다. 페페는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백인우월주의 비밀결사 KKK(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의 하얀 두건 등과 더불어 미국 사회에서 혐오표현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죽은 줄 알았던 페페는 태평양 건너 홍콩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것도 민주주의와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페페는 노란 헬멧과 보안경을 쓰고 경찰의 폭력 진압에 분노한다. 홍콩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발로 뛰는 기자가 되기도 한다. 실제 시위 현장에서는 페페가 그려진 깃발과 팻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8월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여성 시민 1명이 실명 위기에 빠졌을 때는 오른쪽 눈에 피 묻은 안대를 한 대형 페페 인형이 등장하기도 했다.
페페의 역사 : 탄생과 죽음
페페는 만화가 맷 퓨리의 2005년 작품 ‘보이스 클럽(Boy’s Club)’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2008년쯤부터 영어권 커뮤니티 사이트 ‘4chan’과 소셜미디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퉁퉁 부은 눈에 아래로 살짝 처진 입을 한 독특한 표정이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의 심리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14년에는 유명 가수 케이티 페리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페페 그림을 게시하는 등 유명 만화 캐릭터 반열에 올랐다.
평범한 만화 캐릭터에 불과했던 페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논란에 중심에 선다. 사망자 13명을 낸 2015년 10월 오리건주 엄프콰 칼리지 총기난사 사건 당시 범인이 4chan에 총을 든 페페의 그림과 함께 범행을 예고한 글을 올린 것이다. 직후 대권 도전을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페페를 적극적으로 홍보에 활용하면서 이미지가 더욱 나빠졌다. 페페에게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붙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처럼 꾸민 그림도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이 그림을 리트윗하며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결국 페페는 미국 사회에서 혐오 표현물로 낙인찍힌다. 페페에게 나치 제복과 KKK 단복 등 민감한 상징을 입힌 그림까지 나오면서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캠프는 2016년 페페를 네오 나치, 인종주의의 상징으로 규정했다. 미국 최대 유대인 단체 반명예훼손연맹(ADL)은 페페를 나치식 경례, 남부군 깃발과 같은 수준의 혐오표현물로 등재했다.
원작자 퓨리는 극우 세력이 페페를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퓨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페페를 홍보에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페페가 트럼프 대통령 초상화에 오줌을 누는 그림을 공개했다. 출판사 측은 성명을 통해 “페페는 사랑과 관용, 유쾌함을 나타낸다”며 “페페가 긍정과 유대의 상징으로 다시 쓰이도록 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극단주의 세력이 계속 페페를 사용하면서 퓨리는 2017년 5월 페페에게 공식 사망 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페페는 홍콩 시민과 함께 한다.”
페페는 태평양 건너 홍콩에서 전혀 다른 함의를 갖게 된다. 지난 6월 홍콩 시민들이 송환법 반대 시위에 나선 이후 페페가 민주주의와 저항의 상징으로 널리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외신들도 미국 극우의 상징인 페페를 홍콩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AFP통신은 “서구에서 극우의 상징이었던 페페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저항의 상징이 되면서 명예 회복을 했다”며 “인터넷 유행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페페가 홍콩에서 원래부터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던 건 아니다. 시위가 벌어지기 전 페페는 홍콩 젊은이들 사이에서 스마트폰 메신저 어플리케이션 왓츠앱의 인기 이모티콘 캐릭터로 통했다. 송환법 파문이 불거지고 시위가 본격화되면서 홍콩 시민들은 페페를 자신들의 마스코트로 받아들였다. 차별, 배제, 증오의 상징이었던 페페가 단합과 연대, 저항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지하철역에는 여러 명의 페페가 각양각색의 옷차림과 표정을 한 채 줄줄이 손을 잡고 있는 스티커가 나붙었다. ‘희망’이라고 적힌 팻말을 든 페페 그림이 벽면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졌다. 홍콩 시위의 핵심 구호인 ‘홍콩 해방은 우리 시대의 혁명’ 팻말을 목에 건 페페 실물 인형이 거리에 등장했다.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도 페페를 둘러싼 논란이 한때 있었다고 한다. 페페가 홍콩 시위에서 상징물로 쓰이고 있음을 소개하는 외신 보도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다. 그때까지 페페를 평범한 만화 캐릭터로 여겼던 홍콩 시민들은 페페가 미국에서 극우 상징물로서 기피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해했다. 홍콩 시위의 국제적 이미지를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왔다. 정작 원작자 퓨리는 홍콩 시민들이 페페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데 대해 환영한다는 뜻을 내놨다. 퓨리는 페페 사용과 관련한 한 홍콩 시민의 이메일 질의에 “훌륭한 뉴스”라면서 “페페는 시민과 함께한다”고 답변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