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같은 나뭇잎은 없습니다



습관처럼 가을이 되면 꺼내 읽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된 버릇이어서 책도 낡았고 종이의 빛깔도 바랬으며, 곳곳에 밑줄이 그어진 손때 묻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책을 펴면 고향 집 햇살 따뜻한 툇마루에 걸터앉은 듯도 싶고, 조용한 수도원 고목 아래 퇴색한 나무 의자에 앉은 듯도 싶습니다.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구절구절이 세월에 잘 익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가옵니다. 라이너 마이너 릴케의 ‘기도 시집’입니다.

책에는 읽을 때마다 새로워서 그때마다 그은 밑줄이 겹쳐 있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묻는 자는 당신에게 중요치 않습니다.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당신을 가슴에 품은 자를 바라봅니다.” “내가 믿는 것은 말해진 적이 없는 모든 것입니다.” 그런 구절 중 하나가 “오 주여, 그들 하나하나에게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그가 사랑, 의미, 그리고 고난을 겪은 삶에서 가버리는 그러한 죽음을”입니다. 시인이 구하는 것은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했고 의미를 느꼈으며 고난을 겪은 그 자리에서 떠나는 고유한 죽음을 달라고 구합니다. 그것은 곧 고유한 삶을 달라는 간절한 간구일 터이고요.

고운 모습으로 낙엽이 지지만 같은 나뭇잎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이 있습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