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130년 문화 장벽’… 여성에게 포디엄을 허하라

뉴욕 필 첫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를 그린 영화 ‘더 컨덕터’. 라이크콘텐츠 제공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를 이끌고 있는 장한나. 크레디아 제공




여성 지휘자의 역사는 근대 오케스트라와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최초의 근대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이 1882년 창단된 후 5년 뒤인 1887년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메리 웜이 서곡을 지휘한 것이 그 시초이다. 클라라 슈만의 후계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녀는 이때 베를린 필을 직접 고용해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그럼에도 베를린 필이 창단 100년 만인 1982년에야 여성 단원을 받아들인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분명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빈 필은 1997년에, 뉴욕 필은 1966년에 첫 여성 단원을 선발했다. 그만큼 오케스트라는 남성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문화의 온상지였다.

여성들이 지휘봉을 잡기까지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1929년 구스타프 말러의 제자였던 작곡가 리제 마리아 메이에르는 메리 웜처럼 베를린 필을 고용해 자신의 ‘코카인’ 심포니를 초연하려 했다. 하지만 흥행이 저조하자 그녀의 남편은 돈 많은 미망인이 남편감을 찾고자 콘서트를 개최한다고 신문에 거짓 광고를 냈다. 광고를 보고 모여든 남자 관객들의 난동으로 콘서트홀은 아수라장이 됐고, 이 사건은 ‘코카인 스캔들’로 기록됐다.

그 와중에도 극소수의 재능 있는 여성 지휘자는 베를린 필 포디엄(지휘대)에 섰다. 1923년 에바 브루넬리가 여성 최초로 베를린 필 프로그램 전체를 지휘했고, 1년 뒤 영국의 에델 레진스카가 그 뒤를 이었다. 1930년에는 베를린 음악원 학생이었던 호아니아 소르데와 안토니아 브리코가 학위 마지막 코스로 이 악단을 지휘했다.

14일 개봉하는 영화 ‘더 컨덕터’는 이들 중 한 명이자 뉴욕 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930년 베를린 필과 1938년 뉴욕 필을 지휘할 당시 그녀는 ‘남자 100명’을 혼자 상대해야 했다. 현재 두 악단에는 각각 10여명과 40여명의 여성 단원이 활동하고 있으니 그때보다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여성 지휘자들의 입지는 여전히 좁다.

“여성 지휘자의 속치마가 보이면 음악이 시작된다는 신호다”라는 성차별적 발언을 감수하면서 포디엄에 오르는 그들에게는 늘 단발적인 기회만 주어졌고, 음악감독과 같은 안정된 직위는 남자들 몫이었다. 사설 악단을 제외하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음악감독직을 역임한 여성 지휘자는 전 세계에서 실비아 카두프(독일 졸링엔 시립 오케스트라, 1977~1985)가 유일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성시연만이 서울시향 부지휘자를 거쳐 2014~2017년 경기 필 음악감독을 역임했을 뿐이다.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를 지휘하는 장한나는 세계 오케스트라계를 이끄는 소수의 여성 음악감독 중 한 명이자 유일한 한국 여성이다. 그녀가 13일부터 자신의 악단과 함께 서울 부산 대구 익산을 돈다. 첼로 신동으로 사랑받던 어린 시절보다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82년생 장한나’의 지휘가 한국 음악계에 또 하나의 전환점으로 다가오길 기대한다.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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