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연 드러내는 연기… 어둡고도 짙은 매력의 얼굴 ‘김윤석’


 
영화 ‘1987’
 
영화 ‘극비수사’
 
영화 ‘황해‘
 
영화 ‘남한산성’




한국영화 100년사를 빛낸 배우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동시대 배우를 쓸 땐 꼭 생각해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과연 이 배우가 미래의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배우 혹은 전성기를 지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배우를 다룰 때는 던지지 않는 질문이다. 하지만 현재 개봉관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동시대 배우를 100년사라는 연대기 안에서 다룰 때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사에 선명한 인장을 남겼는가? 그리고 그 인장이 현재적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유효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김윤석은 미래가 짐작되는 배우이다. 미래의 영화사에 김윤석의 자리가 예측되는 것이다.

이미 김윤석은 몇몇 기념비적인 작품과 그 작품 속 캐릭터로 명실상부한 영화사적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김윤석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더 다양한 면이 기대되는 배우라는 점에서 말이다.

형사 김윤석

김윤석이 관객에게 처음으로 각인된 작품은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이었다. 영화는 대범하게 한국은행을 터는, 한국형 하이스트 무비(강도·강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장르)의 새로운 시작점이 된 작품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앙상블 연기와 그 속에서 주·조연의 조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주연인 박신양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의 점잖은 이미지였던 백윤식을 닳고 닳은 사기꾼으로, 김상호나 박원상을 기능적 별칭으로 기억되게 한, 한국영화의 새로운 조연의 등장을 확실히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범죄의 재구성’은 범죄자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영화적 즐거움을 구현했다. 수사관보다는 범죄자들의 화려한 언변과 은밀한 세계가 눈길을 더 끌 수밖에 없었다. 형사는 사고가 난 이후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말 그대로 벌어진 일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으니, 김 선생(백윤식) 일파가 주·조연이라면 형사들은 보조 주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보조 주연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김윤석이 맡은 이 형사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형사는 반장인 천호진에게 밀려 거의 있으나 마나 보이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김윤석의 이 형사는 단연 눈에 띄었다. 병원에 입원한 얼매(이문식)를 찾아가 수액 거치대를 빼서 혼을 내고 자양강장제를 뿌리는 장면에서, 이 형사의 모습이 발견된 것이다. 김윤석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형사1 캐릭터를, 고수 범죄자를 상대하는 만만치 않은 형사 캐릭터로 재탄생시켰다. 그렇게, 생생한 조연 배우로 그는 관객들의 기억에 남았다.

김윤석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맡았던 배역이 바로 형사와 경찰이다. 전직 형사였던 ‘추격자’(2008·감독 나홍진)의 엄중호, ‘거북이 달린다’(2009·이연우)의 시골 경찰 조필성, ‘극비수사’(2015)의 공길용, ‘암수살인’(2018·이상 곽경택)의 김형민까지, 김윤석의 형사 캐릭터는 스펙트럼이 꽤 넓다. 좌충우돌 충청도 다이하드의 주인공이었던 공길용, 비록 불법 매춘이나 하는 전직 경찰이지만 윤리적 공감 능력을 가진 엄중호처럼 정통 형사는 아니지만 인간미를 잃지 않은, 선보다는 차선의 경찰·형사의 영역을 확장했으니 말이다.

선과 악은 선명한 만큼 좁다면 차악과 차선은 불분명하지만, 그 인간학적 스펙트럼이 넓다. 돈에는 관심 없는 부유한 형사 김형민이나 미신에 꽂힌 공길용 역시 형사라는 진부한 상투성을 벗어나 인간학적 다양성 끝에 놓인 인물들이다. 특히 여러 배우가 악을 상대하는 상대적 선으로 강한 형사 연기를 시도하는 데 비해 김윤석은 힘을 빼고, 천천히 그 주변을 맴도는 인상을 준다. 김윤석의 형사 연기가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악의 탐구

김윤석이 강한 연기를 보여줄 때는 ‘악’으로 등장할 때이다. 김윤석을 연기파 배우로 각인시킨 작품들 역시 대개 감당할 수 없는 힘의 악일 때이다. 비교적 작은 배역이었던 ‘타짜’(2006·최동훈)의 아귀만 해도 그렇다. 경상도의 아귀는 ‘타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뿐이지만 한국영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악당으로 손꼽힌다. 배트맨이 조커로 보충된다면 ‘타짜’의 고니(조승우)가 아귀로 완성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 얼마 안 되는 출연 시간이지만 아귀는 내기 화투 세계의 비정함과 잔인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캐릭터로 각인된다.

그 악의 향연은 나홍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황해’(2010)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중국 동포와 범죄자의 잔혹성을 결합한 작품으로, 영화 속 면가는 완전히 새로운 폭력의 주체로 등장했다. 거친 털옷을 걸치고,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으로 손질이 덜 된 고기를 뜯어 먹는 장면은 지금껏 한국영화에는 없었던 야만적이며 무차별적인 폭력의 원본이 되기에 충분했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장준환)의 석태도 그랬다. 지금껏 논쟁적인 작품으로 기억되는 ‘화이’는 화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서사이기도 했지만 한편 선의마저도 악의로 앙갚음하는, 석태의 패륜을 그린 충격적 서사이기도 하다. 선의를 베풀었던 자에게 오히려 모욕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여자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짓밟는 석태. 게다가 아이에게 잔혹한 살부극을 매개하는 그 인물은 여러 면으로 보아 인간의 내면 아주 깊고, 왜곡된 곳, 그 심연의 끈적한 밑바닥에 깔린 악의 기원을 길어 올리는 캐릭터이다.

김윤석은 그 깊이도, 바닥도 알 수 없는 악을 텅 빈 눈빛과 감정 없는 목소리, 둔탁한 떨림 가운데 단호한 몸짓으로 그려냈다. 불쾌하고, 난해하고, 까다로운 작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독특하고, 심오하고,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석태라는 캐릭터의 매혹이다. 김윤석은 그 악의 심연을 그럴듯하게 드러냈다.

어둡고, 짙고, 다양한 세계

김윤석 하면 악역 혹은 형사로 환기되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 중 하나는 바로 ‘천하장사 마돈나’(2006·이해영 이해준)의 아버지 역할이다. 영화에서 그는 아들의 성적 정체성과 씨름이라는 스포츠에 대해 매우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폭력적일 수 있는 아버지를 보여준다. 아들의 유연한 변화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데에는 아버지의 무능력, 무뚝뚝함이 그림자 역할을 한 게 크다. 바로 그 어둡고 강한 그림자를 김윤석이 보여준다.

김윤석은 밝음보다는 짙고 어두운 세계를 드러내는 데 어울리는 배우이다.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을 몇 번 맡았는데,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2016·홍지영)나 ‘쎄시봉’(2015·김현석)이 그런 역할들이었다. 로맨스라는 점에서 다른 영화들보다 밝을 것 같지만 사실, 이 로맨스는 실패한 사랑 이야기이거나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에 더 가깝다. 김윤석이 상실을 기억하는 캐릭터에 더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윤석의 어둡고 짙은 매력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 바로 ‘검은사제들’(2015·장재현)과 ‘남한산성’(2017·황동혁)이다. 오컬트라는 이국적 하위 장르가 한국형 공포영화로 자리 잡게 된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 바로 ‘검은 사제들’이다. 강동원의 수단과 라틴어 대사도 인상적이었지만 김윤석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어둡고 짙은 이미지는 고뇌하는 수사의 역할에 무척 잘 어울렸다.

이 고뇌하는 고독한 이미지에 ‘의지’가 보태진 게 바로 ‘남한산성’의 김상헌이다. 최명길(이병헌)의 유연함에 굴욕적 처절함이 있다면 김상헌의 강직함에는 단단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김윤석의 김상헌은 꼿꼿하고 단단하다. 긴 수염 끝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칼끝을 내미는 손짓이 담아내는 어둡고 짙은 내면의 세계, 김상헌의 의지와 김윤석이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윤석은 2018년 ‘미성년’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미성년’은 두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를 담은 여성 중심의 영화이다. 김윤석은 연출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시시하고도 별 볼 일 없는 남자, 남편, 애인, 아버지의 역할을 해낸다. 그가 지금껏 해왔던 배역에 비교하자면 턱없이 볼품없는 남자이다. 하지만, 낯선 여성의 언어와 소녀의 세계를 그려나감에 있어 김윤석은 꽤나 안정적이고 윤리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데뷔작이었지만 배우의 호기로 폄하되지 않았던 맥락이기도 하다. 감독으로, 배우로, 차기작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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