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2019년은 ‘선물’ ‘기적’ ‘은혜’라는 세 단어로 압축되는 것 같아요. 그동안 배우로서 방황을 많이 하다가 이제 하루하루 연기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자고 마음먹은 참이었는데, 때마침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에요.”
그야말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영화 ‘극한직업’과 드라마 ‘열혈사제’(SBS)로 연타석 흥행포를 쏘아올린 배우 이하늬(36) 얘기다. ‘극한직업’은 1626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국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고, ‘열혈사제’는 최고 시청률 22%를 찍으며 지상파 드라마 부진의 고리를 끊어냈다.
이하늬 본인으로서는 이 같은 결과가 수치상의 성공 그 이상을 의미한다. 2006년 미스코리아 진에 오르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1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면서 줄곧 시작만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이후 처음 맞은 전성기인 셈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하늬는 “‘극한직업’의 흥행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서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같다. 그렇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기쁨은 여기까지다. 이제 받은 걸 다 내려놓고 다음을 받아들여야 할 시기”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연차가 어느 정도 쌓인 뒤에 이런 시기가 온 게 감사하더라고요. ‘전성기니까 누려, 내가 잘해서 잘된 거야’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나이인 거죠(웃음). 얼마나 기적 같은 선물인지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캐릭터와 대본, 연출까지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진 덕이니까요.”
이하늬는 그렇게 무던히 다음 걸음을 내딛뎠다. 13일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신작 ‘블랙머니’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블랙머니’는 IMF 경제위기 이후, 외국자본이 국내 은행을 헐값에 인수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떠난 론스타 사건을 토대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엮어 극화한 작품이다.
극 중 이하늬는 국내 최대 로펌의 국제 통상 변호사 김나리 역을 맡았다. 은행 매각 사건을 파헤치는 양민혁(조진웅) 검사를 만나 자신이 믿고 있던 확신이 흔들리자 갈등하게 된다. 그는 “생소한 경제용어가 많아 다소 낯설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의 작업이라 신선한 자극이 됐다”고 했다.
실화 바탕의 작품이라 극 분위기는 다소 무겁다. 이하늬는 “최근 작품들에서 몸 쓰는 액션을 소화하다가 이렇게 차분히 에너지를 낮춰 연기를 하니 신선하더라”면서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하는 작품이다. 큰 사랑을 받은 전작의 여운이 좀 더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서울대에서 국악을 전공한 이하늬는 가야금 연주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평생 음악을 천직으로 여겨온 그이건만, 연기를 만나 비로소 ‘내게 이렇게 잘 맞는 예술장르가 있었구나’ 느꼈단다. “예민한 현악기는 저의 넘치는 에너지와 완전히 맞지 않았어요. 이제야 제 에너지를 다 쓸 수 있는 장르를 만난 거죠(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