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정부가 급작스러운 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겨냥해 실탄을 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 참여자 106명이 숨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시아파 벨트’로 묶인 이웃 나라 이라크에서 만성적 민생고와 이란의 내정 개입에 대한 반발로 두 달 넘게 시위가 이어져 300여명이 숨진 상황에서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서도 대규모 유혈사태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시아파 벨트 국가인 레바논에서도 한 달 넘게 민생고 시위가 이어져 국회 회기가 연기됐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19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믿을 수 있는 보고에 따르면 이란 내 21개 도시에서 최소 106명의 시위 참가자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앰네스티는 “목격자 진술, 소셜미디어 동영상, 망명 중인 이란 인권운동가들의 전언 등을 근거로 사망자 수를 집계했다”며 “실제 사망자 수는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200명 이상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다”고 덧붙였다.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참가자 12명만 사망했다는 이란 측 설명과는 크게 다른 수치다.
앰네스티가 입수한 영상에는 이란 보안군들이 헬기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쏜 것으로 보이는 장면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보안군들이 총기와 최루가스, 물대포를 사용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는 장면도 포함됐다. 앰네스티는 “보안군이 이란 전역 100여곳에서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된 시위를 과도하게 무력 진압했다”고 설명했다.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던 이란 정부는 전날 국민의 75%에 해당하는 6000만명, 1800만 가구에 생계 보조금을 지원키로 결정했다. 문제는 이란의 위기가 자국 차원을 넘어서 있다는 점이다. 시아파 동맹국인 이라크·레바논에서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발해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 벨트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시아파 벨트 3개국에서 번지고 있는 시위의 일차적 원인은 높은 실업률과 부진한 경제 실적으로 인한 만성적인 민생고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 정부와 체결했던 핵합의를 지난해 일방적으로 파기한 뒤 대(對)이란 경제제재를 시행하면서 이란의 경제 생산력이 큰 폭으로 하락했고 그 여파가 배가됐다.
영국 더타임스는 “시아파 3국의 경제위기가 미국의 이란 제재 탓에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란은 지난 10여년간 시아파 인구 비율이 높고 국내 정세가 불안정한 이라크와 레바논, 시리아에서 정치·군사 활동을 펼치며 영향력을 확대해 시아파 벨트의 맹주로 올라섰다. 하지만 종주국인 이란이 미국의 제재로 동맹국을 보조할 수 없게 되면서 시아파 벨트 전체가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라크와 레바논의 시위 현장에서는 이란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는 반이란 구호가 다수 나오고 있다. 정부 내 친이란 인사들이 정치 불안과 경제난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이라크에서는 친이란 정부 관계자·정치인들의 명단이 공개되기도 했다.
미국 등 서방 세력이 시아파 3개국의 소요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이란 정부는 시아파 벨트 국가들에 강경 진압을 강요하고 있다. 제재에 굴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주며 내부 단속에 나선 것이다. 이란 정부는 친이란 성향 민병대들에게도 강경 대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인명 피해가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