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작용 적은 생물학적 제제 휴미라
중증 환자 본인부담 연 1200여만원
“건보 특례 적용해 달라” 잇단 청원
직장인 이모(34)씨는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항문, 생식기 등 드러내 놓기 민망한 부위에 끊임없이 염증이 생기는 희귀한 피부질환을 앓고 있다. 고2때부터 원인모를 상처와 통증에 시달렸고 그 때마다 드레싱과 항생제로 버텨왔다. 심할 땐 염증에서 배어나온 고름이 속옷에 묻어 생활의 불편이 컸다.
군 제대 후 겨드랑이 피부 밑의 염증들이 서로 연결돼 굴을 형성하는 단계까지 악화됐다. 의사는 ‘농루관(염증 통로)’이라고 했다. 고름을 짜내고 염증 통로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1년 뒤 재발했다. 그 이후론 답이 없는 ‘어둠의 터널 속’을 헤매야 했다.
이씨에게 한줄기 빛이 비친 건 올해 3월 생물학적 치료제(휴미라)를 접하면서부터다. 염증 반응을 조절하는 물질을 차단해 염증을 말려버리는 약이다. 처음 한 달간 7번을 투약했고 이 후 월 4회씩 주사맞고 있다. 이씨는 “휴미라 주사를 맞기 전 염증이나 통증이 100이라면 지금은 30 정도로 줄었다”면서 “생물학적 약물은 환자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고 들었는데, 나한테는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문제는 만만치 않은 약값이다. 주사제 한 개(1Pen)에 41만원인 휴미라(40㎎)의 경우 건강보험이 적용돼도 본인부담이 60%다. 주사 한 번 맞는데 24만여원을 내야 한다. 첫 달 172만원, 이후 매달 98만원씩 연간 1200여만원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셈. 이씨는 “희귀질환으로 지정돼 산정특례(본인부담 10%)를 받으면 짐을 훨씬 덜 수 있을 것”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10년 전 같은 화농성 한선염을 진단받은 40대 A씨도 “그간 엉덩이에 생긴 염증의 고름을 짜내고 고약을 바르거나 백년초 찜질을 하기도 했는데, 낫기는커녕 증상이 더 심해지기만 했다”면서 “올해 1월부터 휴미라를 맞고 나서부터 고름 양이 80% 줄었다”고 했다.
A씨는 지난해 10여년간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상처 부위가 좀 그래서, 부끄러운 병이고 재발도 잦아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많다”는 그는 “의사 권유로 휴미라를 쓰고 나서부터 많이 좋아져 일을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했다. A씨 역시 “약값 부담이 크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030 삶을 옭아맨 염증
이씨와 A씨의 삶을 오랫동안 옭아매 온 화농성 한선염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통상적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중등도 혹은 중증 환자들은 심한 통증과 악취, 고름, 보기 흉한 흉터 등으로 정상생활이 힘들고 재발이 잦다. 질병 고통과 함께 사회의 색다른 시선도 견뎌내야 한다. 특히 사회·경제활동이 활발한 20, 30대 환자들이 많아 학업과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병은 피부가 접히는 부위의 모낭(털주머니)에 심한 염증이 생기는 게 특징이다. 겨드랑이, 사타구니, 엉덩이 주변, 항문과 생식기 주변, 여성의 가슴 아래가 주요 발병 부위다. 피부 깊숙이 붉은 염증 덩어리와 그로 인한 상처가 반복돼 나타난다. 심한 경우 염증이 곪아터지면서 고름이 흘러나온다.
차기 대한여드름학회장인 이미우 서울아산병원 피부과 교수는 23일 “얼굴에 생기는 여드름과 임상적 모양이 비슷하지만 한선염은 여드름보다 염증과 흉터가 더 크고 심각하다. 얼굴에 주로 생기는 여드름과 달리 겨드랑이나 엉덩이 등 민망한 곳에 생겨 환자들이 느끼는 심리적 고통이 더 심하다”고 설명했다. 여드름이 주로 생기는 사춘기를 지나고 20대 초반에 많이 발생한다.
증상에 따라 1기(1, 2개 농양이 있지만 농루관이 형성되지 않고 흉터도 없음), 2기(재발하는 농양과 함께 농루관, 흉터가 보임), 3기(염증, 흉터, 농루관이 모두 융합된 병변으로 보임)로 구분된다. 발생 원인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유전적 요인, 면역학적 이상, 호르몬 영향 등 복합적 원인이 관여하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심한 여드름으로 오인하기도
드물게 자연 치유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악화와 재발을 반복하고 수술해도 1년 안에 재발 확률이 50%에 달한다. 환자들은 외부로 드러나는 상처, 고름 등으로 인한 외모의 변화로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증을 겪는 등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 교수는 “심한 여드름이나 뾰루지 등으로 오인해 방치하거나 민간요법에 의존할 경우 치료 시기를 놓쳐 상황을 더 나쁘게 할 수 있다. 초기에 올바른 치료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항문이나 생식기 염증을 방치할 경우 방광, 요도 등에 구멍이 나는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모든 환자에게 효과적인 치료법은 없다. 환자 개인의 증상에 따라 다양한 약물과 수술을 병합해 치료하는 게 원칙이다. 항생제와 비타민A, 스테로이드제, 면역 억제제 등이 쓰이고 계속 재발할 경우 수술이 필요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3년 전 생물학적 치료제인 휴미라가 화농성 한선염에 효능을 인정받으면서 환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염증 발생에 중요한 ‘종양괴사인자(TNF)’에 특이적으로 결합해 염증 반응이 일어나는 경로를 원천 차단하는 약이다. 기존 약물에 반응이 없거나 부작용이 있는 경우 쓸 수 있다.
2006년 말 국내 처음 허가된 뒤 류머티즘성 관절염, 크론병, 건선 등 15개 질환 치료에 쓰이고 있다. 2016년 1월부터 화농성 한선염으로 치료 범위를 넓혔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만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 1년에 1000만원 넘는 약값은 큰 부담이다. 이 때문에 치료를 미루거나 포기하는 환자들도 적지 않다.
환자들 “건보 산정특례 지정 해달라”
인터넷커뮤니티 활동 환자들을 중심으로 화농성 한선염을 희귀질환으로 지정해 건보 산정특례 지원을 받도록 해 달라는 청원 운동이 최근 시작됐다. 질병관리본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게시판에는 최근 2~3개월 사이 화농성 한선염 환자들의 이 같은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
질본은 2016년 12월 희귀질환관리법 시행을 계기로 기존 희귀·난치성질환으로 묶었던 관리체계를 희귀질환과 중증 난치질환으로 나눠 산정특례를 각각 지원하고 있다. 희귀질환은 환자 수(유병률)가 2만명 이하일 경우 지정된다. 중증 난치 질환은 환자 수 기준에선 벗어나지만 중증도 높고 진료비 규모가 크다고 판단될 경우 지정된다. 현재 희귀질환은 926개(내년 1월부터 1014개 확대), 중증 난치질환 산정특례 대상은 207개가 지정돼 있다.
질본 관계자는 “화농성 한선염의 경우 새로운 체계의 희귀질환 지정 작업(2018년 9월 대상 질환 발표)에서 검토가 이뤄졌지만 당시 유병자 수와 환자 1인당 본인 부담 진료비 기준에서 벗어나 최종 목록에서 제외된 걸로 안다”고 설명했다. 당시 검토된 화농성 한선염 환자 수는 3만1000명 정도로 추정됐다. 유일한 국가 단위 유병률 연구결과 인구 10만명 당 59.6명 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돼 이를 국내 전체 인구로 환산해 나온 수치였다.
하지만 질본이 최근 건보공단의 화농성 한선염 실 진료자 수 자료를 확인한 결과 매년 1만명 정도가 진료받는 걸로 파악됐다. 환자 수 측면에선 희귀질환 지정 기준에 부합한다. 게다가 예전과 달리 고가의 생물학적 제제 사용자가 늘면서 고액 진료비를 내는 환자도 늘고 있다.
질본 관계자는 “환자 민원이 잇따르는 만큼, 희귀질환 재지정 검토를 위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 다만, 희귀질환 지정 작업은 2년마다 이뤄지는 게 원칙이어서 빨라도 내년 10월 이후 검토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희귀질환에 포함되지 못하더라도 ‘중증 난치질환 산정특례’ 지정도 고려될 수 있다. 대한여드름학회는 “중등도에서 중증(2, 3기)의 화농성 한선염 환자 가운데 항생제 등 통상적 치료에 효과가 없는 환자들은 휴미라 같은 생물학적 치료가 꼭 필요한 만큼, 이들만이라도 ‘중증 화농성 한선염 상병코드’를 별도로 신설해 산정 특례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실제 난치성 피부질환인 건선의 경우 중증 건선 환자들에게 이런 방식의 산정특례 혜택이 주어지고 있으며 중증 아토피 피부염도 2021년부터 적용된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질병 코드 신설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개정을 주관하는 통계청과 협의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중증 한선염 질병 코드가 만들어지면 환자 수나 진료비 규모 등 반영해 산정특례 지정 여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등도에서 중증의 국내 화농성 한선염 환자는 전체 환자의 약 25%, 약 2000명으로 집계되며 이 가운데 생물학적 약물치료가 필요한 인원은 약 27%(540여명)로 추정된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