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정부가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 영향을 미친 세력 중 하나로 K팝 팬들을 지목하는 보고서를 내 논란이 일고 있다. 23일(현지시간)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보고서는 칠레 내무부가 작성해 최근 검찰에 제출한 112쪽 분량으로, 일간 라테르세라가 내용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칠레 정부는 보고서에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을 도화선으로 시위가 격화된 지난 10월 18일부터 11월 21일까지 한 달여간 소셜미디어 등에서 시위와 관련해 500만명의 사용자가 쓴 게시물 6000만건의 빅데이터를 분석했다.
보고서는 게시물 중 19.3%가 칠레 밖에서 생산됐다며 시위 초기 외부 세력이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문제는 보고서가 시위에 영향력을 미친 그룹을 제시하면서 해외 언론, 중남미 좌파 인사들과 함께 K팝 팬들을 지목한 것이다. 보고서는 시위 초기 8일간 400만건 이상의 리트윗을 통해 시위 동참을 부추긴 인터넷 이용자들을 ‘K팝 팬들’이라고 명시했다. 이들의 게시물은 정부의 시위 사망자 통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권 침해를 언급하며, 언론의 침묵이나 소셜미디어 차단 등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보고서 내용이 공개되자 정부가 시위의 원인이나 책임을 무시한 채 외부 세력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야당 소속 카롤 카리올라 하원의원은 “방금 내무장관이 말한 ‘대단히 정교한 정보’를 확인했다. 망신스럽다”며 “정부는 K팝 팬 등에 책임을 씌우며 국내외적으로 비웃음을 사고 있다”고 꼬집었다. 앞서 곤살로 블루멜 내무장관은 보고서와 관련 “빅테이터 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대단히 정교한 정보를 제출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야당 소속 하원의원 마르셀로 디아스도 “세금을 엉뚱하게 썼다”며 “우리한테 필요한 건 정책이지 K팝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야당은 보고서 책임자가 누군지,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인터넷에서도 조롱이 잇따랐다. 한 네티즌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K팝 그룹 멤버들의 공항 사진과 함께 “칠레 사회 혼란 주범들의 공항 독점 사진. 얼굴을 가렸다.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썼다. K팝 스타들의 손가락 하트 모양 그림과 함께 ‘새로운 혁명 인사법’이라고 쓴 네티즌도 있었다. 이 같은 논란에도 카를라 루빌라르 내무부 대변인은 CNN 칠레와의 인터뷰에서 “폭력 시위를 선도하는 글의 다수가 칠레 밖에서 왔다. 외국 영향력이 컸다”며 보고서 내용을 옹호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