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정제되지 않은 시대의 자화상을 실험과 도전으로 그려

‘목욕의 신’(왼쪽 사진)과 ‘방과 후 전쟁활동’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 웹툰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다. 필자 제공
 
‘목욕의 신’과 ‘방과 후 전쟁활동’ 작품을 그린 만화가 하일권. 연합뉴스




김성환 고우영 허영만 이현세 윤태호 조석 강풀…. 이들 만화가의 이름은 곧 한국만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만화는 ‘B급 문화’라는 편견을 이겨내면서 한국의 현대사와 궤적을 함께했다. 국민일보는 2020년 새해를 맞아 한국만화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당대의 사회상까지 살피는 연재물 ‘만화는 시대다’를 선보인다. 웹툰 시장을 이끄는 만화가 하일권을 시작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국만화의 발전상을 살피는 시리즈다. 원고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만화 분야 전문가인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 겸 만화애니메이션텍 교수와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가 맡기로 했다. 두 필자는 번갈아가면서 한국만화 역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만화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테미러스(Taemirus)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신들의 목욕을 관장하는 신이었지. 고대 인간들에게는 ‘목욕’이라는 개념이 없었어. 그렇게 때도 안 미는 더러운 인간들을 불쌍히 여긴 테미러스는 인간들에게 목욕이란 것을 전해주게 되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인간들이 몸을 씻고 때를 밀기 시작한 게. 하지만 자신의 허락 없이 인간들에게 목욕을 전해준 테미러스에게 분노한 제우스는 테미러스를 코카서스산 꼭대기에 묶어놓고 자신의 번개를 엮어 만든 번개 때타월로 매일 그의 때를 밀게 했어. 극심한 고통에 전신의 때를 다 밀어도 다음 날이면 다시 때가 원래대로 불어나서 매일매일 같은 고통을 느끼며 때를 밀어야했지.”(‘목욕의 신’ 2화 중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지닌 거대한 목욕탕, 신화적 분위기를 띠기도 하는 장소인 ‘금자탕’에서 스물세 살 주인공 허세는 자신의 방황하는 젊음을 새로운 직업으로 숨긴다. 그는 때밀이가 되어보지 않겠냐는 한 늙은 사수를 통해 제우스의 아들인 테미러스의 신화를 듣게 된다. 하일권의 웹툰은 이렇듯 과장과 왜곡이라는 만화의 근본적인 기교를 자신만의 해학과 뒤틀기로 한층 더 폭발시킨다.

대중탕 온탕에서 구상한 ‘목욕의 신’

정제되지 않은 호기심의 시작, 누구나 갖게 되는 상상력으로부터 실제 이야기를 담아 버무려내는 실천력, 그래서 하일권 만화가 갖는 서사의 울림은 ‘지금의 나’가 ‘과거의 나’를 소환하며 시작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서도 읽어낼 수 없지만, 하일권 웹툰의 주인공 표정에서 문득 나를 발견하면 그때 그의 웹툰은 반가움을 넘어서곤 한다. 그래서 포털에 연재되는 무료 웹툰의 독실한 독자인 10대들은 두터운 종교적 팬덤에 동참한다.

시대를 읽고, 매번 스스로를 깨고 나오는 모험을 벌이고, 그렇게 실험과 도전을 반복하는 작가 하일권. 그의 웹툰은 동어반복 같은 캐릭터의 일상을 통해 독자들을 상대로 기 싸움을 벌이면서 독특하고 차별화된 재미를 만들어낸다.

군대를 제대하면서 여러 가지 삶의 고민을 반복하다 결국 ‘졸업은 해야지’ 생각하고 복학한 대학에서 그는 우연히 웹툰의 세계를 발견했다. 디자인과 애니메이션 등 여러 방면의 비상구를 고민하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만화 창작은 웹툰 1세대로서의 모험을 포털사이트에 시도하게 했다. 독자들의 댓글에서 그는 생명력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을 궁금해하고, 지지하며, 기다린다는 느낌은 성실함과 도전정신의 기반이 됐다. 그때부터 봇물 터지듯 시작된 이야기의 향연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나면 정신없이 따라간 스토리의 마지막이 허망하게 느껴지곤 한다. 돌이켜보면 거의 익숙해진 장르의 기시감 탓에 관객은 이것이 좋은 영화인지 자문하면서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영화를 IPTV와 지상파에서 다시 만나면 반가운 느낌이 들고, 반복해 봐도 질리지 않는 서사가 그래서 밉도록 질투가 난다. 하일권의 서사는 그런 이야기의 한국적 변종이다.

지금의 세대를 현미경으로 읽고, 플롯과 스토리는 망원경으로 해석하는 능력. 그래서 공감 지수가 여전히 독자들 눈높이에 머무르는 영악한 작가가 하일권이다. 스스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겸손해하는데,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날카로운 호흡은 그래서 더 공격적이다. 본인도 다음 이야기에 어떤 소재와 반전, 독특한 캐릭터가 나올지 독자들보다 더 궁금하다고 말하곤 한다. 순진한 듯 철저하게 교활한, 양면의 작가다. 그는 목욕탕에서 온탕에 몸을 담근 채 ‘목욕의 신’을 구상했다. 일상에서 얻은 아이디어는 그 순간 전편의 스토리를 마무리해야 다음 단계로 진행된단다. 뜨거운 물에 몸이 불어서 정신이 어질해질 정도까지 기어이 전체 이야기를 상상 속에서 마무리하고서야 온탕을 나왔다고 하니,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직업을 즐기며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이 제일 재미있어하는 재주가 있다.

코미디인데 웃음이 나지 않는다. 웃긴데 표정은 움직이지 않고, 가슴이 웃는다. 그런 경험이 신기해서 계속 이야기에 빠져드는데, 그럴수록 가슴으로 웃는 경험이 결국 가슴으로 울게도 만든다. ‘목욕의 신’ 주인공 허세가 자신의 직장이었던 금자탕을 떠나는 장면에서, 자신조차 억제할 수 없는 분노의 자아가 비현실적으로 폭발해서 감정의 기복을 더 진짜처럼 토로하는 ‘병의 맛’의 연출에서, 마블의 히어로보다 더 현실적인 고민 속에 영웅놀이가 신물이 난다는 ‘스퍼맨’의 주인공 표정에서 독자는 흐느끼게 된다. 울고 있는데도 정화되지 않는 영혼의 카타르시스는 여전히 숙제로 남고, 매회 거듭되는 문제들의 축적은 늘 걸러내지 못한 고민으로 치환된다. 독자에게 그런 독특한 여행을 선물로 선사하는 하일권의 웹툰은 그래서 무료 연재가 종료되고도 유료로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다.

독자 눈높이 맞춘 중독성 있는 서사

하일권은 웹툰의 비상구를 고민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고고고’에서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준비된 이야기를 움직이는 웹툰, 즉 ‘무빙툰’ 혹은 ‘액션툰’으로 실험했었다. 그러한 작화 효과를 개발한 엔지니어와 네이버 웹툰의 소프트웨어 ‘웹툰에디터(WebtoonEditor)’를 출시하기도 했다. 스크롤로 읽던 독자들이 매번 깜짝 놀라게 되는 횡과 열의 돌발과 튀어나옴은 그래서 반가움보다 더 역설적인 시대의 응전이다.

‘마주쳤다’에서 보여주는 증강현실(AR) 웹툰의 기술들 또한 실제 어렵고 복잡한 알고리즘이 아니다. 웹툰을 이해하고 독자의 시각에서 출발한 엔지니어의 애정 어린 코딩에서 출발한 개그 같은 기술의 변형이다. 빤히 독자를 쳐다보는 여자 주인공은 쿨하게 묻는다. “이름이 뭐니?” 자신에게 질문하는 주인공의 거짓말 같은 실재감은 바로 이어지는 스마트폰의 텅 빈 여백에 자신의 이름을 쓰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반문하게 만든다. 손가락으로 웹툰 주인공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정리해주고, 입김으로 훅 불어 상대의 머리를 날릴 수 있다는 AR 웹툰의 인터페이스는 놀랍다기보다는 반갑고 익숙한 서비스로 느껴진다. 작품에 내가 들어가고, 내가 작품을 함께 만들고 있다는 경험은 웹툰의 신세계가 나의 일부로 들어와 있다는 비현실의 리얼리티다. 웹툰을 보고 있는 독자의 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게 만들고, 그 파일의 전송과 이어지는 주인공 캐릭터의 공간이동은 내가 사는 시간에 웹툰이 함께하고 있다는 시대적 공감을 자의식에 남겨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강조하는 정신분석학의 '아브젝시옹'처럼 폐기되는 자아의 파편들이 독자의 상상력을 붕괴시키며 매번 다시 재생시킨다. 하일권 웹툰이 보여주는 실험은 야하지 않아서 더 야한 성인 웹툰을 히어로물로 빚어내는데, 그 이름이 ‘스퍼맨’이다. 자신조차 억제하지 못하는 지상최강 슈퍼 정자를 갖고 매번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주인공은 콘돔으로 만든 히어로 슈트에서 초능력의 현실을 두려워한다. 한국형 슈퍼 히어로가 필요하다는 상상력만으로 성인 웹툰 장르의 전혀 다른 층위를 부상시키는 시도. 그래서 ‘스퍼맨’은 고정관념에 찌든 성인들을 비웃는다. 들켜버린 일탈이 더 무서운 것처럼 ‘스퍼맨’이 주는 공격은 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킨다.

블랙 코미디의 씁쓸한 감성과 그로테스크한 표현들의 역설적 비판은 하일권 웹툰 대부분에 등장하는 학교라는 공간과 함께 늘 새로운 소재의 웹툰을 등장시키곤 한다. 아마도 아직 작가는 독자들과 등산을 하는 듯하다. 저만치 앞에서 정상을 향해 걸어가며 뒤돌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마치 ‘방과후 전쟁활동’에 등장하는 고3 수험생의 병영 일기처럼 여전히 궁금하고 신기한 여행이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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