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장대한 아름다움… 민주화 역사 지켜 본 대한민국 상징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 세워진 지 50년이 지나며 박정희 정권의 상징에서 역동적인 현대사를 지켜본 광화문의 풍경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국민일보DB
 
조각가 김세중 (1928∼1986)
 
이순신 동상 뒷면에 새겨진 이은상 시인이 쓴 명문(위)과 박정희의 헌납(아래) 등 제작 내역을 담은 명판. 이병주 기자
 
종교 조각으로도 유명한 김세중의 작품 ‘김 골롬바와 아녜스 자매’(석고상·1954년 제작).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순교한 김효임 효주 자매를 형상화한 것으로, 문화재로 등록됐다. 김세중미술관 제공


거리의 저 조각물은 누가 만든 거지? 드라마와 영화 속 저 그림은 또 누구 작품이지? 굳이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 속에 미술품은 널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술 작가와 제작 경위, 뒷얘기에 대한 친절한 정보, 시대사적 맥락에 대한 해석을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가 ‘궁금한 미술’을 통해 독자들이 궁금해할 생활 속 미술현장을 격주로 찾아가 여러분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풀어드립니다. 많은 관심과 제보 부탁드립니다.

세밑인 지난 31일 광화문 광장에 갔다. 파란불이 켜지자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 무심히, 바삐 걷는 걸음새지만, 저마다 따끈한 소망 몇 개쯤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라 표정 어딘가에 숨어 있을 벅찬 기대감을 훔쳐보고 싶었다.

광장은 횡단보도와 횡단보도 사이에 섬처럼 놓여 있다. 색이 진분홍이라 유난히 튀는, 대형 나무가 심어진 화분이 눈에 띈다. 서울시가 보수 정당의 천막을 철거한 뒤 기습하듯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는 화분 옆에는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 분향소’가 있다. 반대편엔 세월호 전시 공간 ‘기억과 빛’이 있다.

이런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며 ‘충무공 이순신장군상(이하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제는 광화문의 상징, 광화문의 풍경처럼 돼 버려 동상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누가 제작했는지 궁금해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마침 동상을 배경으로 수원에서 체험학습 왔다는 여중생들이, 군산에서 올라온 엄마와 꼬맹이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셀카를 찍고 있었다. 그들은 궁금해 하려나.

동상 제작자는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이다.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할 정도로 두각을 보였던 조각가이자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교육자였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행정가이기도 했다.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생 필적 확인 문구로 나온 시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편지’ 중)를 쓴 김남조(93) 시인의 남편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의 애국선열 동상 세우기 1호 사업

동상이 세워진 건 박정희 정권 때인 1968년 4월 27일이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근대화와 함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1966년 8월 15일 애국선열조상(彫像)건립위원회가 발족됐다. 이후 1968년부터 이순신 세종대왕 김유신 을지문덕 원효대사 유관순 신사임당 정몽주 강감찬 등 역사 속 위인의 동상이 전국 곳곳에 건립됐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그 동상 세우기의 1호 사업이다.

화강석으로 된 좌대가 10.5m, 구리로 된 인물상 높이가 6.5m이다. 좌대의 하층부는 돌출시켜 청동으로 된 거북선을 놓았고 바닥면 양쪽엔 북이 눕혀 있다. 한껏 치솟은 좌대 높이에 더해 장군 입상의 키까지 더해져 어른 키 10배가 넘는 그 동상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취했다. 오른손에 큰 칼을 잡고 복부를 내민 당당한 자세로 호령하듯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세에선 카리스마가 풍긴다. 동상 뒤로 경복궁과 북악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동상이 세워진 위치로선 아마도 전국 최고이지 싶다.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싶어서였을까. 혹은 12척의 배로 무수한 왜의 적선을 이긴 구국 영웅 이순신의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고 싶어서였을까. 대통령 박정희는 모형을 제작할 때부터 관심을 보이며 김세중의 작업실을 두 번이나 찾을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동상 제작을 위해 직접 900만원이 넘는 건립기금을 헌납했고 동상에 새긴 한자 ‘충무공이순신장군상(忠武公李舜臣將軍像)’ 글씨도 썼다. 미술사학자 조은정이 쓴 책 ‘동상’(다할미디어)에 따르면 이순신 동상 자리엔 4·19기념탑이 예정돼 있었다. 5·16군사 쿠데타 이후 지금의 ‘수유리 4·19민주묘지’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 시대의 상징이 됐다. 이것은 동상에 따라붙는 오명이기도 하다.

이순신 동상은 김경승, 윤효중 등 다른 조각가들이 제작한 것이 진해, 거제, 부산 등지에 있다. 미술계에선 정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이순신 동상이 기념비로서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는 게 중론이다. 광화문의 이순신은 갑옷을 착용하면서도 무관들이 입던 치마 같은 전복(戰服)을 두르고 있어 고전미를 풍긴다.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어 ‘항장(降將·항복한 장수)’ 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전용 칼이 아니라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칼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김세중의 서울대 미대 후배인 원로 조각가 최종태는 “여하튼 우리나라 기념 조각 중에 제일 괜찮아. 작품성이 탁월해”라며 극찬해 마지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이경성도 “모뉴멘탈한 장미(壯美)의 작가”라고 평했다. 한마디로 장대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동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의 문화다.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양의 장군 동상은 주로 기마상이다. 이순신 동상의 우뚝 선 자세는 조선 능묘의 ‘무관석’에서 도상을 따온 것”이라며 서구 문화의 독창적 수용을 높이 샀다.

김세중은 이외에도 국립극장 분수조각 ‘군무’(1969), 장충동공원의 ‘유관순 열사 동상’(1970), 국회의사당의 ‘애국애족의 상’(1986) 등 10여점의 기념 조각을 수주할 정도로 기념 조각 분야에 족적을 남겼다.

‘박정희 시대의 상징’에서 ‘광화문의 상징’으로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이후 여러 번의 철거와 이전 위기를 겪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먼저는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7년 무렵에 일어났다. 고증 논란에 휘말리며 1980년 2월 재건립이 확정됐지만 박정희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백지화됐다. 논란의 이면에는 자신의 이미지를 장군에서 관리자로 변신시키고 싶어했던 박정희의 심리 변화가 깔려 있었다.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지 50년이 지났다. 수차례의 위기에도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틸 수 있는 것은 예술적 탁월성과 함께 시간이 흐르며 어느새 광화문의 풍경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순신 동상은 광화문이 갖는 장소적 상징성을 전유해버렸다. 해방 군중이 춤을 췄던 그 광장에서 1987년 민주화운동의 거대한 함성이 퍼졌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일궈낸 촛불집회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곳에서 이뤄졌다. 그 모든 역사적 장면을 이순신 장군은 두 눈을 지릅뜬 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박정희 시대의 상징에서 대한민국의 상징이 됐다. 본래 이미지는 탈색되고 새로운 이미지를 국민들이 입히고 있는 것이다.

동상에 기대듯 그 아래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공간이 있다. 세월호 참사에도 나라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 분향소’가 거기 만들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두 눈 부릅뜨고 새해 대한민국이 안전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는지 지켜볼 것 같다.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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