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사춘기가 한창이던 무렵, 아이와 나누는 대화는 의도와 무관하게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대화는 말다툼으로 끝을 맺었고, 아이는 어김없이 “다시는 엄마와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아”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점점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방향이라고 제시했던 조언을 아이는 불편해 했다. 자신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말도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당황스러웠다. 아이의 행동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청소년 시절 나는 누군가로부터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만 공부를 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무리 하라고 말씀하셔도 하고 싶지 않으면 딴짓을 하곤 했다.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 결론을 내렸다.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보다는 방식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미리 전달하는 게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잔소리처럼 여겨질 수 있는 반복되는 말은 하지 않고, 꼭 해야 하는 말은 분명하게 한 번에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서로가 감정적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좀 더 뒤로 물러서는 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 역시 아이와 함께 변화해나간다. 성장하는 아이에게 맞는 대화 방식의 필요성도 절감하게 되었다. 이후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경우가 생기면 상당히 조심스러울 때가 많아졌다. 괜히 조언을 했다가 상대방이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튜브, 힘낼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에 보면 저자는 참견과 조언에 대한 구분을 이렇게 풀어낸다. “물어오는 말에 답을 하면 조언이 되고, 묻지 않았는데도 먼저 꺼내면 참견이다.” 상대방을 아껴서 하는 말일지라도 그 사람이 원치 않으면 의미 없는 말이 된다. 그러니 생각만 해두기로 한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의견을 물어온다면 의견을 이야기해주는 것까지만 한다. 다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심지어 이마저도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