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판, 소리와 추임새



문제가 생기면 서구에서는 영웅을, 한국에서는 책임자부터 찾는다고들 한다. 부정적인 남 탓 성향을 꼬집는 말이라 듣기엔 불편해도, 그 말이 맞는다 싶은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마주하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작은 전통음악 공연장에서 우리 문화에 대해 다르게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날의 공연자는 능청스러운 농담과 재치를 섞어 판소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무대를 열었다. 어딘가 어색한 청중들의 분위기는 어느새 소리꾼의 맛깔난 입담 덕에 금세 긴장이 풀어졌고 나 역시 무대에 쏙 빠져들어 갔다. 진행자의 설명에 의하면, 판소리는 ‘판’, 즉 청중,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판에 ‘소리’자가 소리를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과정이 일방통행이 아니고 청중과 서로 소통하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우리 전통음악의 특징이라고 했다. 이러한 소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추임새’인데 바로 ‘판’이 ‘소리’를 ‘추켜세워 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즉 청중이 공연자에게 ‘너 참 잘한다, 덕분에 신이 난다’며 칭찬하며 흥을 돋우는 것이 바로 ‘얼쑤’, ‘절씨구’, ‘좋~다’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 모르더라도 그저 흥에 겨운 대로 추임새를 던지면 되는 것이니, 다 같이 편하게 놀아 보자는 말과 함께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에 청중 모두가 호응하여 저마다의 추임새를 던졌고, 소리꾼은 재치 있게 추임새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공연을 이어나갔다.

그날 내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너와 나의 구분 없이 광장, ‘판’에 모여 ‘소리’를 공유하며 즐기고 ‘추임새’로 소통하는 것이 우리네 전통문화라는 점이었다. 여러 역사적 비극과 일상의 크고 작은 고통으로 이러한 전통이 깨지고 고립되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이지만, 잠시나마 옹기종기 모인 판에서 앞뒤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통이 주는 힘은 대단했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식지 않는 군불 같은 흥을 느끼며, 문득 우리가 일상에서도 추임새로 서로서로 추켜세워 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깎아내리기보다 소소하게라도 추임새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이 겨울, 이 명절, 조금은 더 따듯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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