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나라의 5대 황제 옹정제는 45세 늦깎이로 제위에 올랐다. 61년간 통치한 아버지 강희제는 죽기 직전 넷째인 옹정제를 계승자로 지목했다. 황위 계승 과정에서 벌어진 황자들의 암투, 대신들의 파벌싸움 등 폐해를 체험한 옹정제는 즉위 후 고위 관료들을 처벌하고, 경쟁자인 형제들은 서민으로 강등시키는 숙청작업을 했다. 이어 관료주의 타파에 주력했다. 돈과 권력을 함께 쥐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관료사회, 정치 보스를 양산하는 과거제도까지 뜯어고치려 했다. 그는 백성을 위하고 관료주의와 싸운 명군이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관료주의와의 싸움은 후임 건륭제 때 유야무야됐다. 관료사회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 초기 “파리부터 호랑이까지 때려잡겠다”며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하자 옹정제를 모델로 삼는다는 얘기가 나왔다. 시 주석은 2013년 6월 “정신 나태, 능력 부족, 인민과의 괴리, 부패라는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며 “잘못된 기풍을 대청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패와의 전쟁’은 그러나 시 주석이 권력을 다지는 구실이었다. 시 주석의 정적들은 부패 관리로 지목돼 하나씩 제거됐다.
그리고 19차 당대회 때 시 주석 측근 그룹이 최고 지도부인 상무위원에 대거 진입했고, 리커창 총리 등 상무위원들이 시 주석에게 업무보고를 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로써 상무위원들이 대등한 관계인 집단지도체제는 와해됐고, 시 주석 1인 독재체제가 굳어졌다. 권력 2인자인 리커창 ‘패싱’도 노골화됐다.
시 주석의 부패와의 전쟁으로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면서 관료사회의 보신주의가 심해졌다. 관가에서는 시 주석의 지시가 없으면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심지어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없어 신문과 TV를 보고 시 주석의 생각을 이해하고 추측해서 결정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렸다.
결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신종 코로나) 사태에서 시 주석 체제 관료사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난해 12월 8일 신종 코로나 확진자가 처음 발생했지만 시 주석이 “단호하게 병의 확산을 억제하라”고 지시한 지난달 20일까지 관료들은 눈치만 봤다. 전염병을 감지하고 “사스가 출현했다”고 경고한 의사들은 공안에 끌려가 반성문을 써야 했다. 또 사람 간 전염이 확인됐는데도 중국 당국은 “전염 위험은 비교적 낮다”고 거짓말을 하다 시 주석이 나서자 “사람 간 전염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의료진 감염 사실도 한참을 숨겼다. 지난달 23일에는 발병지인 우한을 봉쇄했으나 이미 500만명이 빠져나간 뒤였다. 마궈창 우한시 서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끄럽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신종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중국 지도부는 책임 회피를 위한 시나리오를 가동하는 분위기다. 시 주석은 지난 3일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열어 “당의 지휘를 따르지 않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은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미 전염병 대응에 소홀한 지방 관리들은 줄줄이 징계를 받거나 자리에서 쫓겨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또 중국 방문자의 입국을 금지한 미국에도 “고의적인 공포를 조성하지 말라”고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들불처럼 번지는 민중의 분노를 시 주석이 아니라 나태한 관료나 미국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중국 매체들은 우한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스토리, 10일 만의 병원 건립, 시 주석의 ‘군 동원령’ ‘군 의료인력 1400명 투입’ 등을 부각하며 애국심을 적극 고취하고 있다. 인재(人災)에 대한 비난을 희석시키는 일종의 물타기다. CNN은 “현재 중국인들의 분노는 우한의 저우셴왕 시장에게 쏠려 있지만, 그 화살은 곧 시진핑으로 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 주석은 여러 영역에서 리 총리의 권한까지 침범해 거의 모든 의사결정권을 행사해 왔다. 따라서 각종 실정의 책임도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시 주석에게 돌아가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시 주석은 전날 회의에서 “사태를 감독하는 당과 정부 지도자들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당과 정부 지도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