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본 적 없는 브랜드와 상품이 매일 등장하는 시대다. 반면 브랜드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그만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전성기를 지난 기업들이 순순히 잊히지 않기 위해 택하는 것이 ‘리브랜딩’이다. 로고와 슬로건을 교체하는 간단한 마케팅 전환부터 기업 주력 상품과 사명까지 송두리째 바꾸는 ‘환골탈태’ 방식 리브랜딩도 이뤄진다. 하지만 고객들에게 다시 사랑받는 신선한 브랜드로 돌아가는 기업은 소수다.
던킨은 지난달 9일 리뉴얼해 문을 연 직영점 시청점 매출이 한달 새 140% 올랐다고 16일 밝혔다. 사명을 던킨도너츠에서 던킨으로 변경하고 매장 메뉴 구성을 ‘스낵킹(식사대용 음식)’으로 바꾼 지 한 달 만에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던킨은 1993년 던킨도너츠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진출한 후 승승장구했다. 한때 매장이 900곳을 넘었고 시장 점유율 80%를 넘어섰다. 하지만 도넛의 인기는 곧 시들해졌다. 2018년 기준 매장수가 684개로 줄었고 매출도 2015년 1872억원에서 2018년 1690억원으로 매년 줄었다.
던킨의 고전은 한국 시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본사가 있는 미국 시장에서도 도넛이 밀레니얼 세대에게 외면받은데다 도넛을 대체할 디저트들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던킨의 또 다른 정체성인 커피 사업도 스타벅스 등 커피전문점과 맥도널드 등 패스트푸드점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결국 던킨 미국 본사가 먼저 변화를 시작했다. 창사 70주년인 지난해 1월 미국 던킨도너츠는 사명을 던킨으로 바꿨다. 샌드위치, 쿠키, 도넛 등 디저트 메뉴는 10%쯤 줄이고 커피 메뉴는 늘려 커피전문점 이미지를 부각했다.
국내 던킨은 지난달 본사의 변화를 따랐다. 기존 ‘던킨도너츠’에서 도넛을 뺀 ‘던킨’으로 공식 브랜드명을 변경하고 2020년부터 문을 여는 신규 매장은 모두 던킨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매장과 메뉴 콘셉은 본사와도 다른 독자적인 방향을 정했다. 커피 및 음료의 매출 비중을 기존 40%에서 45%까지 늘리기로 하면서도, 든든한 한끼를 강조한 ‘스낵킹(Snacking)’을 컨셉을 강화했다. 식사 대용으로 매장을 찾는 고객들을 위해 도넛 뿐 아니라 핫샌드위치 등 간편식 메뉴까지 도입한 것이다.
반면 지난해 10월 리브랜딩한 삼성물산 패션브랜드 빈폴의 키워드는 ‘다시 쓰다(Rewrite)’였다. 빈폴은 1989년 론칭 이후 캐주얼 브랜드 1위를 고수해왔다. 하지만 최근 소비 주축으로 떠오른 밀레니얼 세대와의 거리감은 뚜렷했다. 빈폴은 최대한 기존 자산을 유지한 상태에서 새 고객들을 유입시키길 원했다. 그래서 빈폴은 1960~1970년대 감성을 건드리면서 밀레니얼 세대에도 다가설 수 있는 레트로 감성의 제품들과 플래그십스토어를 도입했다. 빈폴 관계자는 “기존 고객은 물론 새로운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밀레니얼 및 Z세대와의 소통을 확대하고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한편 한국적 독창성을 토대로 글로벌 사업 확장의 초석을 마련할 것” 이라고 말했다.
앞선 두 기업이 막 리브랜딩을 시작했다면 휠라는 스포츠패션브랜드에서 영패션 브랜드로 성공적인 리브랜딩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결은 10~20대에 최적화된 프로모션 활동을 통해 제품 정체성을 확고히 한 데 있다. 휠라가 지난해 진행한 협업 프로그램 ‘휠라보레이션’은 휠라의 옛 인기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휠라를 각인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휠라 X 유튜브 게이밍 크리에이터 콜라보 에디션’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뜨뜨뜨뜨, 탬탬버린, 김왼팔, 아구, 소니쇼 등 크리에이터와 팬들이 함께 즐길만한 굿즈와 한정판 제품을 제작 판매했다.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점과 부산 벡스코 국제게임전시회장에서 열린 행사에는 10대 고객들이 밤새 줄을 서 제품을 구매해가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휠라가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한 것은 주요 고객층인 10~20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과거 휠라의 주요 고객층은 30~40대로 스포츠패션브랜드치고는 높은 편이었다. 1992년 국내에 진출한 이후 2007년 100년 역사의 이탈리아 본사를 인수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이후 새로운 고객들을 유입시키는 데 실패하다보니 브랜드와 고객이 함께 나이를 먹었다. 자연스럽게 2016년 리브랜딩을 선언한 휠라의 가장 큰 목표는 어린 고객들에게 조금 더 다가서는 것이 됐다.
휠라는 이런 과감한 마케팅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제품과 유통 혁신이 선행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휠라는 2009년 중국 푸젠성 진장에 글로벌 신발 소싱센터를 건립했다. 신발 업계에서는 제품 제작단계에서 샘플 제작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편이다. 휠라 관계자는 “자체 샘플 제작 시설이 없어서 해외 공장에 맡기면 수천 수만켤레 만들고 버리는 과정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며 “그동안 소비자가 질 수 밖에 없었던 이 비용을 줄이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휠라는 또 도매 유통채널 영업전략을 총괄하는 홀세일 본부도 운영했다. 기존 백화점과 대리점 위주의 소매 방식만을 고집하던 것에서 벗어나 폴더와 ABC마트, 슈마커 등 도매 채널 유통에 일찌감치 뛰어든 것이다.
제품과 유통 혁신에 성공하면서 휠라의 매출도 2015년 8157억원에서 지난해 2조9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새로 태어난 휠라의 브랜드가 10~20대에게 먹힌다는 확신이 들면서 더 공격적이고 개성있는 마케팅 활동도 가능해졌다.
앞으로 휠라의 과제는 리브랜딩이 ‘반짝 인기’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휠라는 올해도 기존에 성과를 거둔 비즈니스 모델과 개성있는 프로모션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휠라 관계자는 “주고객 연령층을 낮추는데 방점을 찍다보니 좀 더 획기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며 “특히 경계 없는 협업을 통해 젊은 소비자들의 개성과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