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마비 환자 6~7명 중 한명 해당
겉으론 아무 증상 없던 10~40대
갑자기 심장 전기신호 이상 생겨
실신하거나 급사로 이어져
가족 중 병력 있으면 검사받아야
희귀병 거의 지정안돼 지원 사각
25세 여성 A씨는 지난해 초 길을 가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왔다. 심폐소생술로 다행히 곧 회복됐지만 갑작스러운 의식 소실이 유전성 부정맥의 일종인 ‘긴QT증후군’이라는 생소한 병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 아무런 증상이 없어 자신이 그런 병을 갖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A씨는 의료진 권유에 따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돌연사를 예방하기 위해 가슴에 ‘삽입형 제세동기(심장 충격기)’를 넣는 수술을 받았고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다. 주치의는 또 A씨 가족이 해당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형제(언니) 가족의 유전자 검사를 받도록 권고했다.
그러던 중 A씨 가족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하던 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또 A씨 언니 뿐 아니라 어린 자녀들에게도 A씨에게 확인된 긴QT증후군 유발 유전자와 동일한 게 발견됐다. A씨 조카의 경우 현재 증상은 없으나 돌연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위험 요인 회피 교육과 함께 주의깊은 경과 관찰을 하기로 했다.
A씨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유전성 부정맥은 이처럼 사회적 활동이 활발한 20, 30대 청년층은 물론 10대 이하 청소년의 급사(急死)로 이어질 수 있는 질환이다. 한 가정은 물론 사회 경제적 손실이 막대해 심각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특히 이 병은 평소 건강해 보이고 본인이 증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을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다. 병원에 와 일반 심장검사를 받더라도 대부분 정상 소견을 보여 환자나 보호자가 해당 병을 보유하고 있는지 거의 자각하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 돌연사 위험에 처할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급사라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질환임에도 상당수의 유전성 부정맥 질환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희귀질환으로 지정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잠재적 돌연사 고위험군인 가족들은 유전자 검사에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대한부정맥학회는 최근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이처럼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유전성 부정맥 환자들의 실상을 알리고 정부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매일 14명, 유전성 부정맥으로 급사
급사의 원인 가운데 유전성 부정맥이 차지하는 비율은 우리나라의 경우 약 14~15%에 달한다. 일본인의 10%보다 더 높은 유병률을 보인다. 1~2% 정도에 지나지 않는 서양인에 비해선 최대 7배까지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대한심장학회가 2007~2015년 급성 심장마비 환자 1979명을 분석한 결과 14.7%(생존자의 20%, 사망자의 6.4%)가 유전성 부정맥이 원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심장마비로 병원을 찾은 사람 6~7명 중 1명이 유전성 부정맥 환자인 것이다.
국내에선 한 해 약 3만~4만명이 급사하는데, 통계적으로 대략 하루 100명이 세상을 떠난다면 매일 14명은 유전성 부정맥으로 목숨을 잃는 셈이다.
심장마비가 발생하는 이유는 심장근육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관상동맥)이 막혀 심장근육이 괴사하면서 심장이 멈추는 경우(허혈성 심장질환)와 심장근육을 움직이는 전기신호에 문제가 있거나 심장근육 두께가 두꺼워지는 등 변성이 생겨 심장박동이 제대로 안 이뤄지는 경우(비허혈성 심장질환)의 2가지다.
허혈성 심장질환은 흔히 알고 있는 협심증과 심근경색이 대표적이다. 협심증은 쥐어짜는 듯한 가슴통증이 2~10분 있다가 안정을 취하면 사라지고 심근경색은 이런 흉통이 30분 이상 계속되다 심장마비로 이어진다.
유전성 부정맥은 비허혈성 심장질환에 해당된다. 심장과 혈관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가 갑자기 심장의 전기신호에 이상이 생겨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병으로, 첫 증상이 실신이나 급사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10~40대 젊은 연령대에서 발생한다.
실제 고려대 안암병원 순환기내과 노승영, 최종일 교수팀이 연령별 유전성 부정맥 돌연사 발생률(인구 10만명당)을 조사한 결과 45~49세가 4.4명으로 가장 높았고 40~44세(3.2명), 30~34세(3.2명), 35~39세(3.1명), 25~29세(2.8명) 등 순이었다.
유전성 부정맥에는 긴QT증후군(LQTS), 짧은QT증후군(SQTS), 브루가다증후군(BrS), 카테콜라민다형성심실빈맥(CPVT), 조기재분극증후군(ErS), 특발성심실빈맥, 부정맥유발성심실심근병증, 우심실이형성증 등의 어려운 이름의 질환들이 포함된다.
최종일 교수는 ‘급사로 이어지는 유전성 부정맥, 청년 돌연사 해법?’을 주제로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이런 질환들의 공통된 문제는 젊은 나이에 발생하고 증상이 없으며 고혈압이나 당뇨병, 고지혈증 같은 심장병의 선행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병을 방치하고 살다 갑자기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젊은 운동선수들의 경우 경기 중 갑자기 쓰러지기도 한다. 실제 신영록 프로축구 선수는 2011년 24세 나이에 부정맥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로 경기 중 쓰러졌다가 50일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2000년에는 프로야구 경기 중 42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고 임수혁 선수의 사망 원인이 부정맥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배은정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유전성 부정맥에 의한 돌연사는 청년 뿐 아니라 10대나 어린이들에게도 꽤 많이 발생한다”면서 “아이들은 학교 가다가 혹은 뛰어놀다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는 등 성인까지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가족력 잘 살펴야
유전성 부정맥은 평소 심장 돌연사와 부정맥 등의 가족력을 잘 살펴야 한다. 집안에 해당자가 있으면 심장 전문의를 찾아가 심장 초음파나 심전도 검사를 받아 볼 필요가 있다. 이유 없이 실신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유전성 부정맥을 의심해야 한다.
만약 정밀 검사에서 의심 소견이 나오면 환자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유전자 검사를 받고 유무를 확인하는 게 좋다. 환자 상태에 따라 약물 치료를 받거나 이미 심장마비를 경험한 사람은 가슴에 제세동기 삽입 수술을 받아야 한다. 또 평소 달리기와 등산 등 심장에 무리가 되는 활동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한다.
유전성 부정맥 환자 및 가족들의 진단과 치료를 위한 제도적 지원도 절실하다. 급사를 부르는 치명적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희귀질환으로 등록돼 있지 않다. 지난해 긴QT증후군과 카테콜라민다형성심실빈맥 2가지만 희귀질환으로 지정됐다. 희귀질환이 되면 건강보험 산정특례(본인부담 5~10%)와 정부의 의료비 지원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최 교수는 “유전성 부정맥의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한국인에 특히 많이 발생하는 브루가다증후군과 짧은QT증후군, 부정맥유발성심실심근병증 등은 희귀질환 추가 지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다양한 질환을 가진 유전성 부정맥의 경우 현재 질병 코드가 세분화돼 있지 않다. ‘기타 부정맥 질환’ 코드에 뭉뚱그려 등록돼 관리되고 있어 정확한 환자 현황 파악 등이 어렵다. 오는 7월 통계청의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개정안 발표를 앞두고 부정맥학회는 지난달 유전성 부정맥의 질병 코드 조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급사 예방을 위해 제세동기 삽입 수술을 받은 경우 심장장애 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은 인공심장박동기와 제세동기 삽입 등 모든 경우에 심장장애 등급을 주고 있다. 이처럼 높은 경제적 부담과 인식 부족으로 국내 제세동기 삽입 비율은 20%에 그쳐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아울러 유전자 검사의 건강보험 혜택을 가족까지로 확대해 조기 발견이 이뤄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부정맥학회 오용석 이사장은 “유전성 부정맥의 조기 발견을 위해 심전도 검사를 국가건강검진 필수 항목으로 도입하는 것도 고려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은정 교수는 “유전병이고 돌연사를 일으킨다고 하니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한다”면서 “제도적 지원 확대와 함께 유전성 부정맥에 대한 국민 인식을 높이는 정부 차원의 캠페인과 진료 지침 제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