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면 거기에는 새벽의 고요가 가득하다. 대부분 깊이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나처럼 밤을 새우며 글을 쓰고 있을 테고 그이도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어둠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잠깐일지라도 내 마음속에 떠오른 것과 같은 질문이 그이의 마음속에서도 생겨날지 모른다. 누구를 위해 지금 이 글을 쓰는가. 세상의 일이 그렇듯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구를 위해 쓴다는 뚜렷한 목적의식도 없다. 그냥 쓰지 않으면 안 되니까 쓴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질문은 생겨난다.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십오 년 전 첫 소설집을 낼 무렵 아버지는 사다리에서 추락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아버지가 수술을 받는 동안 나는 소설집에 들어갈 작가의 말을 써야 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예후는 어떨지, 수술은 잘 될지, 수술비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와 같은 걱정과 고민 탓에 그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당신이 겪는 실제적인 고통 앞에서 글쓰기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고통을 줄여주지도 위로가 되어주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글쓰기에 환멸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르면 나는 오에 겐자부로를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이의 소설 ‘개인적 체험’을 생각한다. 나한테는 없는 걸 이 소설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오에는 자기 세계가 분명한 소설가였지만 ‘개인적 체험’ 이후로는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이의 삶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현실에서 오에의 첫아들이 그러했듯이 소설의 주인공인 버드는 두개골 결손으로 뇌가 밖으로 튀어나온 채 태어난 아기를 두고 방황한다. 기형으로 태어난 아기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버드의 여정은 ‘도망만 치는 사람이기를 멈추기 위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수술을 결심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일종의 에필로그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방황의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이 이어지는데 이 마지막 부분 탓에 오에는 오랫동안 비판을 받았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낙관적인 데다 비약으로 느껴질 만큼 갑작스러운 전환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런 평가에 동의한다. 그 부분은 완결성이나 통일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현저하게 소설 미학을 훼손하는 군더더기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오에는 이 소설의 후기에서 그동안의 비판을 거론하며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득력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이의 변호에 수긍한 게 아니라 그이의 삶에 수긍했다.
소설이 요구하는 미학적 준거를 오에가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소설 미학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테고 비록 가장 중요한 미적인 가치를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게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오에의 다른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오에는 실제 자신의 첫아들이 그와 같은 병을 지닌 채 태어나 어려운 수술을 치러내고도 여전히 장애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기에 매번 새로운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처럼 온몸으로 절망한 적은 없다고 했다. 오에는 아기가 태어났을 무렵 절망의 바닥에 닿아 본 거였다. 그런 경험을 소설로 쓰는 동안 절망했던 상황을 되풀이해서 겪었을 테고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절망 너머의 희망을 신뢰하는 것이었을 테다. 어쩌면 오에는 그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한 글쓰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 체험’을 발표한 삼 년 뒤 오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자 대표작인 ‘만엔 원년의 풋볼’을 발표한다. 두 작품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글쓰기에도 과정이 필요하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최선을 다해 낙관하여 글쓰기를 환멸하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미학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것들이 그이를 진정한 소설가로 거듭나게 해준 거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처음 수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풋내기 아버지인 버드는 의사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고통스러울까요?
손홍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