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저격당한 박정희 실려간 곳… 한국 현대미술 간판공간으로

붉은 벽돌 건물이 모더니즘 건축 미학을 물씬 보여주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경. 서울관은 민현준 건축가의 설계로 옛 국군기무사 건물을 부분적으로 살려서 2013년 재탄생했다. 이 건물은 192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박길룡이 설계했는데, 둥글게 튀어나온 계단실은 보화각에서도 볼 수 있는 그의 건축 특징이다. 최현규 기자
 
경성의전 부속병원 시절(위)과 기무사 시절의 외관. 김종헌 제공
 
1층에 있는 4분의 1 원 기둥.
 
종친부가 보이는 서울관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탕, 탕, 탕. 그날 궁정동 안가에서 부하가 쏜 총탄에 쓰러진 각하가 다급히 실려 간 곳은 저 건물 2층 어디쯤이지 않을까. 잎을 떨군 노거수가 깔끔한 미색 타일 외벽과 대조를 이루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교육동 건물을 지나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과거, 그곳에는 국군서울지구병원(전신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있었다. 청와대의 유사시를 대비하는 병원이기도 했다. 미색 건물 옆 마당을 지나가면 서울관이 사무동으로 쓰는 붉은 색 벽돌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 2층에선 1979년 그 날, 이른바 10·26사태 이후 실세가 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국을 주무르며 지휘했던 보안사령관실이 있었다.

유신의 종식, 신군부 독재의 산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본 때문일까. 늘 보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거사를 치른 이병헌(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역)을 태운 차가 한밤의 대로 위에서 멈칫 섰던 수초 뒤, 육본(육군본부)을 향해 유턴하지 않고 남산(중앙정보부)으로 직행했다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곳이 군부 독재 유신의 최후가 수습된 공간이면서 신군부 독재인 제5공화국의 산실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2013년 11월 개관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9년, 당시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접근성에 문제가 있으니 서울에 새로운 미술관을 지어달라는 미술계의 숙원을 정부가 받아들임으로써 문을 열 수 있었다. 장소로 소격동 당시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 옛 보안사령부) 본관(등록문화재 제375호) 자리를 내놓았다. 처음엔 허물고 새로 짓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문화재이긴 했으나 외관이 흰색 드라이비트(단열재를 회반죽으로 마감한 외벽) 공법으로 덧칠돼 표정 없는 건물이 되는 바람에 근대 건축으로서의 가치가 희석된 탓이 컸다.

그랬던 분위기는 한국건축가협회 역사위원장으로서 기무사 본관의 보존 여부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하던 김종헌 건축가(배재대 교수)가 국가기록원에서 일제강점기의 도면을 발굴하면서 역전됐다. 김 교수는 6일 “‘한국판 바우하우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한국 근대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라며 “문화재로써의 중요성을 정부에 설득해 보존이 결정됐다”고 말했다. 기무사가 테니스장을 짓는다며 1981년에 인근 정독도서관으로 옮겼던 종친부(조선 시대 종친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도 지금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 출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9∼33년 완공돼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 부속병원으로 출발했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에 인수됐고, 1963년 소유권이 국방부로 이관됨에 따라 1971년 기무사 본관으로 변경이 됐다. 미술관으로 재탄생하면서 건물 외벽의 드라이비트는 벗겨져 원래의 붉은 벽돌이 제 속살을 드러냈다.

경성의전은 1916년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세워졌다. 1919년 3·1운동 때는 다수의 학생 참가자를 배출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관급 학생 167명 중 이곳 출신이 33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연은 이랬다. 의전생들은 해부학 수업에 독립군 시신이 쓰인 걸 알게 됐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는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이렇게 시신이 갈가리 찢기는 신세가 됐는데, 누구는 출세를 위해 메스를 든 것이 아닌가….” 그런 각성이 만세운동 대거 참여로 이어졌다. 파장은 컸다. 조선총독부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할 때 경성의전이 흡수될 거라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의학부를 별도로 세웠다. 경성의전이 임상시험을 하던 총독부의원은 경성제국대학 차지가 됐다. 경성의전은 졸지에 변변한 부속병원 하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경성의전이 지속적으로 요구해 종친부 자리 일부에 간신히 마련한 경성의전 부속의원이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스타 외과 의사 백인제(백병원 창업자)가 경성의전 출신이다.

‘한국판 바우하우스’ 건물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 선수다. 서구에서는 1920년대 들어와 프랑스 출신 르 코르뷔지에, 미국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독일 출신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쟁쟁한 건축가들이 활약하며 모더니즘 건축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고전주의 양식은 한물간 시대였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옛 서울역사인 경성역사(1925),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청사(1926) 등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근대건축이라며 맹목적으로 수용했다. 심지어 1930년대에도 덕수궁 석조전 신관(1938),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1938) 등 고전주의 건축의 영향은 강하게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1920년대 후반에 준공돼 명실상부한 한국의 모더니즘 건축의 시작을 알렸다. 고전주의 건축은 형태미가 중요하다. 열주(列柱)를 통해서 리듬과 규칙성, 대칭성을 강조한다. 반면 모더니즘 건축은 기능성을 중요시한다. 내부 공간 쓰임새가 더 중요하다. 직사각형의 붉은 벽돌 콘크리트 건축으로서 기능 자체에 충실했던 이 병원 건물도 외래실을 넓게 쓰기 위해서 일반적인 사각기둥이 아닌 4분의 1 원 모양의 곡면 기둥을 썼다. 첨단기법인 ‘수평 띠 창’이 사용됐다. 지금은 다 그런 창이다. 하지만 가로로 길게 이어진 수평 띠 창은 내부 공간 사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점 때문에 근대건축의 5원칙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당시로써는 혁신적이었다.

이토 고조 초대 병원장은 이 병원을 짓기 위해 유럽을 시찰하는 등 열성을 보였는데, 이것이 유럽 최신 건축 트렌드의 수용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독일 데사우의 조형학교 바우하우스와 흡사하다. 바우하우스는 모더니즘 정신의 산파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서울관에서 2014년 바우하우스 전이 열렸을 때 방한했던 데사우재단 관계자들은 건물을 보고 “어쩜 이렇게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와 닮았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 놀라운 건물은 한국 최초의 근대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설계했다. 박길룡이 1932년 신문에 낸 건축사무소 개업 광고에서 설계 작품으로 경성의전 부속병원 본관을 꼽은 것이 확인됐다. 김 교수는 “설계자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조선총독부가 지은 것으로만 알려졌다”며 “박길룡이 총독부 재직 시 설계에 참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길룡은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총독부 건축기수(建築技手)로 들어갔고, 조선총독부청사 감독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화신백화점(1937), 간송 전형필이 세운 첫 사립박물관인 보화각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런 건축사적인 가치 덕분에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용케 살아남아 현대미술의 전당이 됐다. 문제는 모더니즘 건축 정신이 지금 제대로 드러나느냐에 있다. 이를테면 이를 증거하는 4분의 1 원기둥은 아트숍에 가려져 있다. 현대미술이라는 아우라에 갇힌 건축적 의미를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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