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육십 넘어서 결심했어요. 이제부터 ‘내 인생’을 살리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거예요. 내게는 최고의 사치죠. 나는 지금 사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배우 윤여정(73·사진)은 작품 선택 기준을 묻는 질문에 매번 이런 답을 내놓는다. “나이가 들어 내 이야기는 다 버렸다. ‘어떤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다면 좋은 일이겠다’ 결심한지 오래”라면서. 돈도 명예도 필요 없단다. 그저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그다. 이런 굳은 결심은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한껏 힘을 실어준다.
윤여정의 선택에는 그야말로 ‘기준’이 없다. 배역이 큰지 작은지, 개런티가 많은지 적은지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단지 시나리오를 읽고, 마음이 가는 작품을 고른다. 최근작들만 살펴봐도 그렇다. 신인감독 입봉작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과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각각 작은 역할을 소화했다.
지난달 19일 개봉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정국에 고전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치매 노인 순자 역을 맡았다. 그가 공허한 눈빛으로 툭툭 내뱉는 대사들은 관객의 가슴에 날카롭게 박힌다. 적은 분량에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5일 개봉한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는 굴곡진 삶을 거친 할머니 복실을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도 몇 장면 등장하지 않는데, 그의 입을 통해 이따금 주제의식이 전달된다. “난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하지.” 윤여정은 김초희 감독의 단편영화 ‘산나물 처녀’(2016)를 함께한 인연으로 출연료도 받지 않고 참여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1980년대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독립영화 ‘미나리’에서 인상적인 열연을 펼쳤다. 국내 공개 전인 이 작품은 미국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윤여정은 미국 매체 어워드와치가 선정한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후보 10인에 메릴 스트리프, 케이트 블란쳇 등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 함께 출연한 후배 전도연은 “윤여정 선생님은 놀랍다. 여전히 트렌디하고, 작품 선택에는 경계가 없다. 난 그의 팬이고, 그가 늘 궁금하다. 내가 그처럼 멋있게 나이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와 함께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계에서 그의 위상에 대해 전문가들도 일제히 엄지를 치켜든다. 윤성은 영화평가는 “영화계 대선배로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상당히 자극이 될 만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그에게도 아름다움을 앞세워 연기했던 젊은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오롯이 배우로서의 욕심을 좇는다는 점이 멋지다”고 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