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국민 캐릭터 등장… 한국만화, 산업이 되다

작가 김수정의 출세작이자 불세출의 작품 ‘아기공룡 둘리’의 캐릭터 컷. 둘리나라 제공
 
작가 김수정은 ‘아기공룡 둘리’를 통해 한국 만화의 자존심을 일궜다. 그는 아티스트이면서, 뮤지컬과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출판만화의 산업적 가능성을 검증한 혁신가이기도 했다. 한국만화가협회장을 맡으면서는 신예 작가들과 호흡하며 조직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렸다. 이투데이 제공
 
왼쪽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작가 김수정의 대표작들. ‘날자! 고도리’ ‘신인부부’ ‘자투리반의 덧니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둘리나라 제공




90년대 중반, 필자는 한국만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를 방문했었다. 당시 한국만화 홍보 임무를 맡고 프랑스에 함께 파견된 김수정 작가는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스타 작가였다. 그의 브랜드는 역시 ‘아기공룡 둘리’였다. 프랑스 왕복 비행기에서 작가를 알아본 승객들의 사인 요청이 쏟아져 기내통로를 막아 긴 대기 줄을 만들 정도였다. 결국 조종사가 방송으로 기내서비스를 위해 자리에 앉아달라는 긴급요청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모든 승객이 자제하고 자리에 앉았는데도 기내서비스가 이뤄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승무원들의 사인 공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간 동료들이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둘리 아빠’이며, 한국에도 우리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있다는 자존감을 만든 작가, 김수정. 그는 한국만화사에서 중요한 산업적 임계점을 실현함으로써 만화도 투자받을 수 있는 산업임을 검증해낸 선구자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캐릭터를 관리하고 마케팅하기 위해 ‘둘리나라’라는 캐릭터 회사를 설립했으며, 30년 이상 기업을 통해 자신의 캐릭터 저작권을 철저하게 지켜냈다. 한국캐릭터의 가치를 축적해온 김수정은 아티스트이면서, 비즈니스 관리자이기도 한 새로운 시대의 혁명가다.

둘리의 흥미진진한 모험

1975년 소년한국일보에 ‘폭우’로 데뷔한 김수정은 우리 아이들이 ‘공룡’이라는 캐릭터를 제일 좋아한다는 절대 명제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확증을 받아낸 상상력의 달인이다. 1983년 월간 보물섬에 ‘아기공룡 둘리’를 연재하기 시작한 그는 ‘오달자의 봄’ ‘날자 고도리’ ‘신인부부’ ‘짜투리반의 덧니들’ ‘아리아리동동’ ‘꼬마인디언 레미요’ ‘소름자 블루스’ ‘귀여운 쪼꼬미’ ‘일곱 개의 숟가락’ 등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소재를 인기연작으로 만든 신의 손이었다. 만화잡지사들은 작가 김수정의 연재가 전제돼야만 창간이 되기도 했고, 때로 편집장들이 새 작품을 먼저 받으려 작가의 집 앞에 대기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작가 김수정의 작품을 살펴보면 다른 작가의 작품과 현저히 다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작품의 말풍선 대사가 정형화된 인쇄체가 아니라 작가 자필로 되어 있다는 점을 기민한 독자라면 기억할 것이다. 어떤 잡지사와 출판사에서도 김수정에게 마감 시간을 강요하기 어려웠고, 작가 또한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작업하며 자필로 대사의 감성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인쇄소에 원고를 가져가는 열정을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독자들이 자신들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리얼리즘이 살아있었다. 김수정은 만화잡지와 단행본으로 인기를 검증받고, 지상파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콘크리트 고정 시청자층과 팬덤을 만들었으며,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지워지지 않는 한국애니메이션의 성공 사례를 각인했다. 일반 극장의 상영패턴을 극복하고, 주요 어린이 고객의 관람 동선을 최대한 보장해주기 위해 COEX 전시관을 전용 상영관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상영관을 전용관으로 하면 오전과 저녁 시간대 관객들 접근이 어렵다는 것을 분석한 결과였다.

출판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재현시키며 김수정은 만화에 필요한 색채와 음악을 실험하기 시작한다. 흑백 캐릭터였던 둘리에게 녹색 옷을 입히고, 입체와 VR로 디자인을 확장했으며, 특수효과와 음악을 통해 한국애니메이션의 표현가치를 업그레이드했다. 실험을 거친 캐릭터는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지면서 입체적이고 실재적인 생명력을 얻게 됐다. 아이들이 수시로 따라부른 아기공룡 둘리 OST는 한국애니메이션의 음악적 완성도를 선도했으며, 캐릭터가 갖춰야 하는 스토리의 여러 필수요소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학습시켰다.

예술의전당 무대에 어린이뮤지컬 ‘둘리’가 처음 올랐을 때는 의구심도 들었다.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한 국내 대표적 제작사 에이콤의 기획과 창작은 이해가 됐으나 미취학 아동 대상의 뮤지컬이 일반 뮤지컬 수준의 높은 티켓비용이 책정돼 실재 흥행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브로드웨이에서는 디즈니가 ‘라이온킹’을 통해 가족 관객을 불러모으는 변화를 일으켰지만, 국내에서는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김수정은 어린이뮤지컬도 일반 뮤지컬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자존심으로 에이콤과 손을 잡았다. 결국 공연은 기대만큼 흥행을 하지 못했고, 중반 이후 티켓할인 등 여러 대안으로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국내 어린이뮤지컬의 가능성과 이후 기획된 프로젝트들의 중요한 시금석이 됐다. 아이들은 막이 오른 뒤 나타난 커다란 둘리와 웃고 손뼉 치며 함께 뛰어노는 친구가 됐다. 극 속 둘리는 아이들에게 신화와 같았다.

이처럼 김수정은 만화산업을 잡지와 단행본이라는 출판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상품, 어린이뮤지컬과 에버랜드와 함께 한 테마파크 캐릭터 비즈니스, 영어교육 콘텐츠 ‘둘리의 배낭여행’ 등 다양한 산업적 지향을 발전시켰다. 더 많은 양적 자본이 만화계에 투입되도록 신선한 아이디어를 늘 실험했다.

둘리를 만들고, 키우고, 지켜내기까지

작가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관리하는 둘리나라는 둘리라는 캐릭터의 품질과 가치, 그리고 스토리를 지켜낸 수문장이었다. 둘리만 그려져 있으면 팔렸던 시절, 그는 당시 월트디즈니코리아가 지켜내던 품질관리 과정을 벤치마킹했다. 그래서 불법복제상품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한국 캐릭터의 질적 자존심을 한 단계씩 쌓아나갔다. 문구·완구·과자·음료·의류 등 모든 어린이 물품에 ‘둘리’라는 캐릭터가 품질보증 마크가 되도록 했다.

김수정은 50대에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 겸허했던 학습 경험을 기초로 대학교수를 했으며, 후학들을 위해 자신을 처음부터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그런 집념은 만화와 캐릭터에 대한 그의 열정만큼이나 순수하고 집요했다. 둘리의 스타 이미지가 필요했던 지자체들의 구애에 맞춰 항상 둘리의 자존감을 지키려 고민했던 작가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적절하게 진화했다. 캐릭터 최초 주민등록증을 부천시에서 만들고 ‘둘리의 거리’를 시민들에게 선물했다. 이후 실제 작품에 등장하는 둘리의 고향인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둘리 뮤지엄’을 개관, 둘리의 역사를 실재 공간에 재현시켰다. 작가는 캐릭터가 이 시대 독자들과 함께 숨 쉴 수 있도록 기획하고 자문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던 2000년에 한국만화가협회장을 맡으면서는 한국만화 정책과 창작환경의 문제점을 산업계·정치계·학계에 이해시켰다. 젊은 작가들의 목소리를 협회에 담아내고, 신진작가들의 과감한 시도를 격려하며 진중하고 책임 있는 선배의 모습도 보여줬다. 이후 한국만화가협회는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며 한국웹툰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동화책 ‘모두 어디로 갔을까’로 다시 돌아온 전설의 이야기꾼 김수정. 그는 여전히 목마르다. 늦둥이 딸과 캐나다 밴쿠버 숲에서 나눈 대화의 시작을 이야기로 만들었듯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친근한 마이크이자 스피커인 만화로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 어떤 세대의 어느 이야기도 그를 거치면 진심이 담긴 친구의 수다가 되고,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되며, 선배의 묵직한 조언이 된다. 전 세대의 이야기가 담긴 그의 작품에는 리얼리즘의 진솔함이 담겨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 숨어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만화적 상상력으로 재현할 수 있는 작가, 독자들의 추억을 만화적 판타지로 재생시킬 수 있는 작가. 또 그 캐릭터들이 실재 세계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있음을 이해시키는 작가이자, 그런 캐릭터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받아야 함을 모두에게 설득해낸 작가. 그가 바로 김수정이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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