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만 국경을 실시간 넘나드는 것이 아니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워싱턴에서는 웬만한 한국 얘기가 실시간 나돈다. 정보 유통에 공간의 장벽이 사라진 지 오래다. 게다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미 중앙정보국(CIA) 관계자들의 주 업무가 한국 상황을 워싱턴에 보고하는 것이다. 한국인도 모르는 은밀한 얘기가 지금 최첨단 통신장비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전문가를 만났다. 그는 대화 도중에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과 최종건 평화기획비서관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답할 때 우리 집의 부끄러운 일을 옆집 사람한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올해 초부터 한국 언론을 통해 불거져 나온 김 차장과 최 비서관 간의 불화설은 워싱턴에서 구문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초, 두 사람이 날짜를 달리 한 채 따로 미국을 극비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갈등설이 다시 떠올랐다. 사이가 좋지 않아 정보를 교환하지 않다 보니 각자 방미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왔다. 둘이 부딪히지 않게 업무를 칸막이식으로 나눴다는 얘기도 들린다.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의 두 핵심 인사가 아직도 서로에게 으르렁대고 있다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시기도 위중하다. 남북 관계는 막혀 있고, 한·미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고, 한·일 관계는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두 사람의 갈등이 풀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랫사람들의 갈등도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북과 북·미 사이를 중재하는 컨트롤타워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블랙코미디다. 문재인 대통령이 4·15 총선 이후 정 실장을 포함해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을 교체해야 하는 이유는 비단 불화설 때문만은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몰고 왔던 한반도 평화의 기대감은 차갑게 식었다. 북한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이달 들어 세 차례나 단거리 발사체를 쏘아 댔다.
북한이 코로나19와 관련한 미국의 지원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올해 북·미 관계는 지구전(持久戰)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원하는 ‘제재 완화’ 선물을 꺼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민주당 후보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기를 기대하면서 대선 이후 아무 눈치 볼 것 없는 ‘재선’ 트럼프 대통령과 본격적인 딜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새 인물로 달라진 국면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현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의 성적표도 그다지 좋지 않다. 이들이 야심차게 밀어붙인 정책 중 성공을 거둔 것을 찾기 어렵다. 북한 개별관광은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도 성사 가능성이 작았다. 철도 연결사업은 행방불명 상태다. 외교안보라인의 업무 스타일에도 뒷말이 나온다. 워싱턴을 방문했던 외교부 고위 관리가 “미국이 ‘스트롱 서포트’를 확인했다”고 강변한 뒤에도 되는 일은 없었다. 외교안보 부처 공무원들은 국민보다 청와대를 향해 말하는 것 같다. 한 인사는 “현 정부에선 정책 추진보다 보안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초 임명한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사라진 이름이 됐다.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전면적인 물갈이가 힘들다면 총선 이후 청와대 인사들만이라도 교체해 새로운 전략을 다질 때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