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에 대해 선입견을 품는 독자들이 많다. 순정만화가 ‘여성 독자들을 위한 감성멜로물’이라거나 ‘일상화된 캐릭터 형식과 익숙한 스토리텔링의 반복으로 이뤄져 있다’는 등의 생각이다. 그러나 1990년대 한국만화 출판계를 만화잡지사가 견인할 때를 돌이켜보면 순정만화 연재 잡지가 별도로 있었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하게 출간됐다. 또 순정만화에 연결되는 일러스트레이션 기획도서와 만화 화보집도 독자적인 팬덤을 형성했다. 소재와 배경, 주연과 조연 캐릭터의 관계, 그리고 대사조차도 각기 리듬이 달랐다. 그런 흐름의 중심에는 여성 스타작가들의 개성 있는 시도와 모험적인 장르 협업이 있었다.
또 하나, 순정만화계의 익숙함과 정형화된 스토리텔링을 벗어나 장르 확장성을 제시하며 독자층을 형성해온 독보적인 남성 작가가 있었다. 한국 여성을 주로 그렸던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연출로 차별성을 만들고, 일본 순정만화의 데생과 캐릭터 일반화로부터 한국만화의 대안적 돌파구를 제시했다. 확장된 팬덤을 구축하며 순정만화의 장르적 한계를 극복해낸 작가, 김동화가 그 주인공이다.
색다른 만화의 길
1975년 ‘나의 창공’으로 데뷔한 김동화는 기존 독자층 수요에 맞춰 작품을 그렸던 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독자와의 대화를 갈구하며 변화하는 소재와 장르에 대한 실험을 계속해 왔다. 필체와 화풍도 여러 번 바꾸는 등 가보지 않았던 길을 스스로 찾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늘 신선함이 스며있었다.
김동화는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80년대까지 선배 순정만화가 화실에서 그림을 익혔다. 감성적인 소년만화부터 일본식 소녀만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거치며 자신만의 미적 판타지를 구축했다. 권영섭 차성진 등 비슷한 연배의 선배 작가들에게도 겸허하게 작화를 배웠다. 그는 기존 국내 순정만화계의 주류 화풍과 신선한 이야기를 연계시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만화방 초기에는 여성 독자층이 두텁지 않아 순정만화의 창작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만화 ‘캔디캔디’의 열풍이 해적만화로 불붙기 시작하면서, 만화출판사들의 순정만화 출간 붐이 시작됐다. 당시 문하생으로 들어온 한승원 작가(김동화의 아내이자 동료만화가)와 함께 1979년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김동화의 순정만화도 본격적인 비상을 시작한다. 김동화 화실에서 만들어진 인기작들은 대부분 한승원 작가와 협업으로 제작됐다. 김동화는 그래서 80년대 초·중반에 창작됐던 ‘내 이름은 신디’ ‘아카시아’ ‘영어선생님’ ‘목마의 시’ ‘요정핑크’ 등의 작품들을 자신의 작품이라기보다 한승원의 작품이라고 평한다.
“처음 김동화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패밀리 네임’이었다. 당시 만화는 만화방으로 유통돼 스타작가 이름을 앞세운 신속하고 기민한 창작과정이 중요했다. 그래서 한승원은 스토리와 펜 터치를 맡고, 나는 출판사 등 외부 업무와 연출 및 데생을 맡아 가족 단위 제작 방식으로 진행했다. 당시에는 만화방에 시리즈가 일단 출간되면 바로 절판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전 작품도 새롭게 복간되고,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제공되는 만화의 디지털 유통시대가 도래했다. 이에 맞춰 다시 유통되는 그 시절의 작품들은, 순정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스토리와 여성적 그림을 완성했던 펜 터치 담당자인 한승원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것이 맞다.”
이런 고백을 하면서 김동화는 ‘곤충소년(사진)’이 자신의 실질적인 첫 작품일 수 있다는 신선한 평가를 전한다. 1985년 보물섬에 연재하며 인기를 끌었던 ‘요정핑크’는 90년대 TV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작가 김동화의 스타성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었는데, 1988년 발표된 ‘곤충소년’은 전혀 다른 소년활극만화로, 장르적 진화이자 도전이었다. 본인이 어린 시절 강해지고 싶었던 희망을 슈퍼히어로 캐릭터로 현실화한 이 만화는 초능력을 갖게 된 소년의 힘을 신선한 장르적 연출로 표현해냈다.
‘빨간 자전거’라는 역작
물론 그의 시도가 독자들로부터 늘 긍정적인 평가를 끌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슬럼프에 빠질 때면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해내려 노력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서 얻은 충격적 영감을 기반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고, 기존 순정만화에서 보여주었던 캐릭터와는 다른 새로운 우리의 미학을 실험했다. 지속적인 도전과 작화 훈련을 통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성인들을 위한 서사를 독자적으로 창작하면서 차별화된 장르가 만들어졌다. 90년대 중반 이후 나온 ‘못난이’ ‘황토빛 이야기(사진)’ ‘기생이야기’ 연작들이 그렇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일본식 순정작화풍과 유럽 등 외국 배경, 서구형 캐릭터를 주로 그렸던 당시 순정만화의 한계를 극복했다. 한국 역사를 시대적 배경으로 과감하게 등장시키며 주인공들의 의상과 대사, 그리고 색감과 정서까지도 새롭게 담아냈다. 그는 1999년 아시아 만화대회에서 최고창의상을 수상하며 한국적 순정만화를 시도한 것에 대한 공로를 평가받는다. 이후 독자적인 독자층을 팬덤으로 구축한 김동화는 일간지로부터 연재를 제안받고 작업에 들어간다. 고향과 부모, 자식과 세대, 자연과 사랑을 따뜻한 아날로그 담론으로 그려낸 작품, 우편배달부의 시선으로 시골 마을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빨간 자전거’라는 역작이 바로 그것이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시작한 도시 노인들의 ‘새동’ 마을과 평생 농사지으며 고향을 지켜낸 시골 노인들의 ‘옛동’ 마을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게 한다. ‘들꽃나무 울타리집’ ‘숲속의 노란집’ ‘쌍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집’ ‘배추밭에 꽃 심은 집’ ‘새가 쉬어가는 집’ ‘별밤에 보면 제일 이쁜 집’ 등 주소보다 따뜻한 이야기가 집배원의 목적지가 되고, 시골 노인은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자신의 편지로 친구의 부고를 먹먹하게 확인한다. 굵은 주름살의 한 할머니는 웃으며 말한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성치 않잖아. 살아온 길, 걸어온 길, 잊지 않으려고 얼굴에 약도를 그려놓은 건데, 즐겁게 웃으며 간 길은 눈 옆에 그려 넣고, 힘들어 이를 악물고 간 길은 입 옆에 그려 넣고….” 김동화의 ’빨간 자전거’에는 이처럼 가슴을 흔드는 잔잔한 바람과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오래된 음악이 있다.
10여년 전 한국만화가협회장을 맡고 있던 김동화는 아주 급하게 전임 협회장이었던 작가 이현세를 찾는다. 당시 한국만화가협회는 90년대 후반 이후 이두호 김수정 신문수 이현세 김동화 등의 협회장을 거치며 리모델링됐고, 젊어졌으며 성숙해졌다. 문화체육관광부도 협회의 적극성에 작가 및 창작지원을 확대했고, 기획과 유통 측면의 지원정책도 다양하게 개발됐다. 그러나 그런 지원에 익숙지 않았던 협회는 전문화된 회계시스템과 정책의 성과피드백이 견고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정부로부터 지원금에 대한 환급 요청을 받게 된다.
협회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 김동화는 한국만화의 자존심과 협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후배들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조직을 지켜내고 회장으로서의 소임을 해냈다. 또 협회의 지원사업 진행 과정을 탄탄하게 구축하고, 올바른 정책수행을 주도하며 한국만화계의 정도를 지켜냈다. 부천시에서 설립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설립과 운영에도 시작부터 함께 하며, 부천국제만화축제 조직위원장으로서의 헌신과 이사장으로서의 힘겨운 업무를 수행해내기도 했다.
김동화는 그동안 작가로서는 도전적인 작품으로 이야기했고, 선배로서는 만화계의 현안에 책임졌다. 한국만화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늘 고민하고 실험했던 그는 지금도 청년의 심장과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그가 만든 길 위에서 우리의 만화는 성장해 왔고, 지금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