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리지는 탁월한 셰익스피어 비평가이면서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대학 학보에 실린 어떤 이의 시를 읽고 전율했다. 얼마나 깊이 감명했는지 열등감까지 느꼈다. 그 시를 쓴 사람은 워즈워스였다. 콜리지는 생각했다. 이처럼 감동적인 시를 쓸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왜 이 시를 읽고 감동했는지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 연구의 결과물이 ‘문학적 전기’(1817)에 담겼다. 이 책에는 지금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논의가 있다. 바로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불신의 자발적 유보라는 그 유명한 개념도 여기에서 나왔다.
콜리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정신이 어떤 한 이미지에 고정되지 않고 이미지 사이를 떠돌게 되면 상상력의 영역에 들어간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상상력의 개념은 콜리지의 논의에 대부분을 빚진 셈이어서 이보다 그럴듯한 설명이 앞으로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만큼 콜리지의 상상력 개념은 선구적이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게 하나의 불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문학과 예술에서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면 많은 이들이 진저리를 치며 또 상상력이야? 하고 되물을 게 뻔해서이다. 더 논의할 게 없을 만큼 완벽했던 탓에 상상력이라는 개념은 정체되었고 오랜 세월 끈질기게 강조되면서 빛이 바래기도 했다.
그런 이유가 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사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작가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이미지 사이를 떠도는 정신은 어떻게 유도되는지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는 작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무수한 대답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나는 루쉰이 단편 ‘쿵이지(孔乙己)’에서 보여준 대답을 하나의 예로 들고 싶다.
쿵이지는 평범하다. 굳이 말하자면 가난한 하층 지식인 계층에 속한다. 쿵이지는 날마다 주점에 와서 동전을 내려놓고 싸구려 술을 마신다. 젠체하는 말투 탓에 모두의 놀림감이 된다. 쿵이지가 주점에 나타나지 않자 어느 부잣집에 일을 하러 갔다가 도둑질한 게 들통이 나서 그 집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마침내 쿵이지가 돌아왔다. 쿵이지는 어깨에 새끼줄로 매단 가마니를 엉덩이로 깔고 앉은 채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자기 몸을 질질 끌면서 주점에 들어섰다. 쿵이지는 아무렇지 않게 예전과 똑같이 동전을 내려놓고 술을 마신 뒤 주점을 나갔다. 여기에서 여느 작가라면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루쉰이기에 놓치지 않은 한 문장이 있다. 중국의 소설가 위화 역시 이 장면에 깊이 감명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바로 쿵이지의 손에 흙이 묻어 있다는 문장이다.
어쩌면 당연한 묘사일지도 모른다. 다리를 못 쓰게 된 쿵이지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자기 몸을 질질 끌고 와야 했으니 손바닥에 흙이 묻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주점에서 일하는 소년의 눈에 하필이면 그 손이, 흙 묻은 손이 발견되어야 했을까. 무심한 척 슬쩍 묘사하고 지나갔기에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나는 이 문장에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앉은뱅이가 된 쿵이지는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손에 흙이 묻어 있다는 묘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눈에 띄는 변화, 두 다리가 멀쩡했던 쿵이지가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는 상황은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에 정신을 고정시킨다. 그러나 흙 묻은 손이라는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흙이 묻지 않은 손과 흙이 묻은 손이라는 이미지 사이를 떠돌게 한다.
쿵이지가 정말로 도둑질을 했다 해도 그에게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여 다리를 부러뜨리고 앉은뱅이로 만들어도 좋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처럼 부당하고 끔찍한 처벌을 받은 쿵이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제도 주점에 왔었다는 듯 차분하게 동전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는 거였다. 손에 흙이 묻은 쿵이지는 결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가 완벽하게 부서지고 절망한 사람임을 알게 된 건 손에 흙이 묻어 있음을 보아서이다. 그의 손은 흙이 묻지 않은 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상상력은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때 실현된다.
손홍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