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멘트, 쓸쓸한 몸짓… 팬들만 기다립니다

프로축구 K리그1 수원 삼성의 한기환(왼쪽), 동환수 장내 아나운서가 수원의 무관중 홈경기가 열렸던 지난달 28일 경기도 수원 수원월드컵경기장 방송실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수원=최현규 기자
 
지난달 25일 경기도 성남 탄천종합운동장에서 만난 성남 FC 마스코트 까오의 모습.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게 본업인 이들은 모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계속된 무관중 경기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성남=윤성호 기자






프로축구 K리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진통 끝에 무관중 개막한 지도 두 달 가까이 흘렀다. 선수나 팬들에게도 어색한 광경이지만 이런 경기장이 더 민망한 이들이 있다. 관중과 호흡하고 환호하는 게 본업인 경기장의 엔터테이너, 구단 마스코트와 장내 아나운서다. 아무도 없는 빈 관중석에 쓸쓸히 앉은 스코트나,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선수 소개 멘트를 하는 장내 아나운서는 이른바 ‘코로나19 시즌’ 축구장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팬들의 응원구호 대신 적막만이 가득한 축구장에서, 이들은 팬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잊혀질까 무서워” 마스코트 ‘까오’

“정말…너무 외로워요.”

가랑비가 내리던 지난달 25일, 경기도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텅 빈 관중석에서 만난 마스코트 ‘까오’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예년과 다를 바 없는 큼지막한 인형탈이지만, 커다란 눈망울에 금방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다. 코로나19로 프로축구 K리그의 경기장 관중 입장이 금지된 지 약 한 달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도 없는 홈 관중석에서 그는 짝꿍 ‘까비’와 단둘이 매 경기 팬들을 대신해 선수들을 응원해왔다. 인형탈 속 사람이 누군지는 구단 직원들밖에 모르는 극비사항이다.

까오는 프로축구 K리그1 구단 성남 FC의 마스코트로 일한 지 올해 4년 차다. 경기가 없는 날은 시내 야탑광장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경기 날은 관중석에서 팬들과 어깨동무하며 선수단을 응원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시내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예고없이 찾아가 경기장에 와달라 초대하는 일도 즐거웠다. 선수의 이름 대신 까오 두 글자를 성남의 선수복에 적어넣고 아이처럼 자랑하던 어른 팬들과, 훌쩍 키가 커서도 자신을 기억하며 반가워하는 꼬마 팬들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감동적인 존재다. 성남의 팬 페이지에는 까오가 활동한 모든 장면을 팬들이 모아놓은 사진첩도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이 모든 일상을 바꿔놨다. 요즘 까오는 서포터즈의 응원 소리를 흉내 낸 전자음에 맞춰 몸을 흔들고, 성남 선수들이 골을 터뜨릴 때마다 깃발을 열심히 흔드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는 “그나마도 머리보다 팔이 짧아 깃발을 화려하게 흔들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팬들을 직접 만나러 나가고 싶지만 인파가 모이기라도 하면 전염병 전파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에 어렵다. 갖은 아이디어를 짜내 구단 SNS 영상에서라도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일명 ‘코로나 시즌’이 개막한 이후 까오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구단 직원들뿐이다. 올 시즌 구단의 스타 유망주로 떠오른 ‘홍시포드’ 홍시후도, K리그 500경기 출장 대기록을 세운 골키퍼 김영광도, 넘치는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김남일 감독도 개막 이후 만나보지 못했다. 까오는 “감독님과는 취임하시는 자리에서 만나 자기소개를 했던 게 마지막 만남”이라면서 “가끔 구장에서 선수단이 훈련할 때도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 직접 다가갈 수가 없다. 훈련장에도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 사흘 뒤인 지난달 2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프로축구를 포함한 프로스포츠에 제한적 관중 입장을 허용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다음 홈경기가 있는 25일부터는 팬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앉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악수를 할 수도, 옆자리에서 승리의 만세를 부르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이 모두 여태까지의 무관중 경기처럼 겪지 못한 일이지만, 당장 까오에게는 팬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반갑고 기다렸다고, 외로웠다고, 또 보고 싶었다고 전해주세요”라고 까오는 말했다.

텅 빈 관중석… 축구장 아나운서의 하루

“경기장은 사람 없이 탁 트여 있는데…느낌은 너무 답답해요.”

20여 년 넘게 함께 일해온 동갑내기 동환수, 한기환(이상 52) 아나운서는 홈경기를 앞둔 지난달 28일 수원월드컵경기장의 방송실 밖 관중석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국내 프로축구에서 가장 두꺼운 팬층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 수원 삼성의 장내 아나운서다. 18년째 일하며 팀의 즐겁고 아픈 시절을 모두 함께했다. 둘의 팀 이름인 ‘투맨’은 수원 팬들에게 너무 익숙하다. 그러나 K리그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둘에게도 이번 시즌은 낯설다. 개막 뒤 두 사람이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건 구단 직원과 취재 기자들뿐이다.

장내 아나운서의 역할은 경기장에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다. 두 사람은 이날도 수십 년 그래왔듯 경기 4시간 전 미리 도착해 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평소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재미를 줄지 이벤트는 어떤 식으로 할지를 고민했겠지만, 그런 고민이 필요 없어진 요즘은 회의가 다소 맥이 빠져있다. 한 아나운서는 “물론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우리도 수원 팬”이라면서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서 둘만 응원하는 것 같아 허전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축구 응원문화의 특별함을 잘 안다. 한 아나운서는 “축구 응원은 전자음이 들어가는 다른 종목과 달리 관중의 함성 비중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수원은 서포터의 힘이 크다. 팬들 덕에 수원 축구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면서 “매 경기가 연습경기로 변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부터 경기장에 내보낼 응원가를 선곡해왔던 그들은 이제 팬들의 함성을 흉내 낸 백색소음까지 고르려 머리를 싸맨다. 하프타임마다 잔디로 내려가 수만 명의 함성을 온몸에 느끼던 것도 이제는 아득한 옛일 같다.

수원은 이르면 다음 홈경기인 19일부터 관중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한 아나운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궁금하지만 일단 관중들을 보면 눈물부터 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구단이 정말 경기를 보러올 팬들에게 잘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도 다시 수원의 축구를 기억할 것”이라면서 “축구를 더 잘하면 좋겠지만 하루아침에 그렇기 어렵지 않겠나. 보러 와준 분들이 1000명이 아니라 100명일지라도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원·성남=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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